우리는 매일 ‘성장’이라는 단어에 둘러싸여 산다. 뉴스는 성장률을 보도하고, 정치인은 경제 성장을 약속하며, 사람들은 나라의 ‘1인당 GDP’를 자랑한다. 마치 그것이 한 사회의 건강함을, 국민의 행복을, 삶의 질을 모두 대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GDP란 결국 일정 기간 동안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총합일 뿐이다. 즉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가’를 보여줄 뿐,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더 많은 소비와 더 빠른 생산이 곧 행복의 증거가 되는 사회에서,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일조차 ‘성장’으로 계산된다.
교통사고가 늘어나면 자동차 수리업체의 매출이 오르고, 우울증 환자가 늘면 제약회사의 이익이 증가한다. 슬픔이 팔리고, 불안이 거래될수록 경제는 ‘성장’한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두고 로버트 케네디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GDP는 모든 것을 측정한다, 우리가 삶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GDP는 공기의 질, 인간관계의 깊이, 아이의 웃음소리를 계산하지 않는다. 그저 돈이 움직이는 순간만을 기록한다. 결국 GDP의 성장은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시스템의 작동 강도를 보여주는 지표에 불과하다. 우리가 정말로 성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GDP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피로해지고 공허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갓 30대가 되었을 때, 나는 나를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인정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그 일을 내가 정말 좋아하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그저 인정받고 싶어서,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느 날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에게 가볍게 물었다.
“그냥 그만두고 제주도 가서 조용히 살면 어떨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이 들어서는 몰라도, 지금 가는 건 아니지.” 그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하나의 경고처럼 들렸다. 젊은 나이에 시골로 내려간다는 건 마치 실패자의 낙인을 찍히는 일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려면 서울에 살아야 했고, 실제로 그 후로 열심히 해서 목표를 이뤘다.
각자의 길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아마 그 친구는 이런 대화를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 일은 마음에 깊이 남았다. 그 대화가 싫었다든지 기분이 나빴다든지 그런 문제가 아니다. 무언가 내 속의 의문을 깨웠달까.
지금 돌아보면,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내 속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인정 욕구나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게 내 삶을 유지할만큼의 크기는 아니었을 뿐이다. 몇 년을 더 서울에서 우왕좌왕하며 버티다가 결국 지칠 대로 지쳐 훌쩍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2년을 떠돌며 세계 곳곳을 지나온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게으르다는 걸, 그리고 남들이 말하는 ‘성장’이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걸. 나는 그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게 가장 즐겁다. 그 형체 없는 세계 속에서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충만하다.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제주도로 내려왔고, 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런 ‘성장’ 없이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은 이 사회의 기준일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의 기준으로 매우 ‘성장’했음을, 지금도 하루하루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다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내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놀라운 속도의 성장을 이뤘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선진국의 문턱에 섰다. 그러나 그 성장의 그림자는 길고 어둡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여전히 회원국 중 가장 높으며, 항우울제 소비량 또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2세를 낳고 키울 엄두도 내지 못해서 말그대로 한국은 ‘사라져’가는 중이다.
경제적 풍요가 늘어도 마음의 평화는 오지 않았다. 우울한 사람은 생산성이 떨어지고 소비도 줄어든다. 하지만 그가 병원에 가고 약을 복용하는 순간, 그 과정은 ‘의료 소비’로 잡혀 GDP를 끌어올린다. 절망의 숫자가 성장의 숫자로 바뀌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현대인은 더 많은 것을 소비하지만, 그만큼 더 공허하다. 그는 생산의 도구가 되었을 뿐, 삶의 주인이 아니다.”
수치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슬픔조차 상품이 된다. 우리는 행복을 잃고, 대신 그 빈자리를 경제적 효율로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런 효율은 우리의 삶을 구하지 못한다. GDP의 그래프가 오를 때, 우리의 마음의 온도는 내려간다. 숫자는 성장하지만, 사람은 병들고 있다.
‘성장’은 오늘날의 세속적 신앙이다. 국가는 성장률을 신처럼 섬기고, 개인은 자기계발이라는 의식을 치른다. 우리는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배운다. ‘자기 성장’은 새로운 윤리이자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회사는 “더 나은 나”를 요구하고, 사회는 끊임없이 “성취하라”고 속삭인다. 그 결과 우리는 늘 불안하다. ‘벼락 거지’라는 단어는 그 불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어제까지 평범했던 사람이 오늘은 뒤처진 존재가 된다. 경제적 성장의 논리가 개인의 내면으로 침투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성장’은 진정한 내면의 발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빠르게 달릴수록 시스템이 더 많은 에너지를 흡수하는 러닝머신과 같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달린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엔진에 연료를 공급하고 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성과사회는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믿는 피로한 인간을 만든다. 그는 더 이상 외부의 타율적 명령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한다.”라고 했다. 이 자기 채찍의 언어가 바로 ‘성장’이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 부르지만, 실은 내면화된 복종이다. 자기성장의 다른 이름은 자기착취다.
그렇다면, 성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 단순한 질문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는 ‘성장’을 생존의 조건으로 삼는다. 흔히들 자본주의를 달리는 자전거에 비유한다. 속도가 줄면 멈추고, 발로 버티지 않으면 쓰러진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페달을 밟아왔다는 것이다. 다리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데 익숙해졌고, 그 각도로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멈추는 법을 잊었다.
멈춘다는 것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쉬어간다’는 말조차 사치처럼 들린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속도에 발을 맞추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낙오자가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미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기후 위기, 불평등, 생태계의 파괴는 물론이고, 개개인의 마음과 몸이 지쳐 쓰러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을 멈출 수 없는 시스템’의 집단적 병증이다.
이제 ‘성장’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바꿔야 한다. 아니, 완전히 바꾸지 못하더라도 확장은 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성장만이 성장의 전부는 아니다. 속도를 늦추는 것, 잠시 멈추는 것,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 — 그것이야말로 더 높은 형태의 성장일지도 모른다. 성장은 늘 ‘앞으로 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때로는 제자리에서 스스로를 다시 세우는 것, 그것도 성장이다.
“우선, ‘탈성장(de-growth)’은 그 자체로 완성된 체계라기보다개발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탈발전(post-development)’ 시대의 대안을 모색하려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깃발이다. 그 목표는 덜 일하고, 덜 소비하면서도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세우는 것이다.”
— 세르주 라투슈, 『성장에게 작별을 고하다』(Farewell to Growth, 2007)
자격증과 기술만이 성장의 증거는 아니다. 지식과 생산성이 아니라 감성과 사유의 깊이로도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성장은 쓸모없다. 읽는 책이 실용서나 자기계발서 위주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경제적 효용성이 보이지 않는 시 한 편은 외면받는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시 한 편이 우리의 감정을 성장시킬지 모른다. 훌륭한 인문서, 철학서 한 권이 우리의 지성을, 관계를, 사유의 폭을 성장시킬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오직 ‘측정 가능한 성장’만을 인정한다. 눈에 보이는 수익, 바로 팔 수 있는 기술, 시장에서 통용되는 효율.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빨리 움직이고, 더 열심히 달리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이렇게 진단한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외부의 적이 없다. 그것은 모든 저항을 흡수하며, 절망마저 상품화한다.” 우리가 성장을 외칠수록, 자본주의는 더 단단해진다. 그러니 이제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성장하고 있는가? 성장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진정한 성장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확장하는 일이어야 한다. 타인과의 관계, 사유의 깊이, 느림과 여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자각. 그것은 경제적 그래프로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명력이다. 성장은 수단이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장의 종착역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하지만, 정작 삶은 점점 비워져간다. 이제는 그 방향을 바꿔야 한다. 더 성장할 것인가, 아니면 더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