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인간이 가진 가장 미묘한 능력이다. 그것은 단순한 저장의 기술이 아니라, 자신을 ‘나’라고 부르게 하는 정체성의 근거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인식의 층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기억은 결코 확실한 토대가 아니다. 때로는 변형되고, 조작되며, 의지와 무관하게 퇴색한다. 그 불안정함은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덕분에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 남는다.
우리는 매우 다른 두 영화를 통해 기억, 그리고 조금 더 확장해서 ‘의식’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이 몸을 버리고 기억과 의식에만 의지하려 한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을 지워도 몸이 끝내 그것을 붙잡는 세계다. 〈공각기동대〉(1995, 오시이 마모루와 〈이터널 선샤인 오브 더 스팟리스 마인드〉(2004, 미셸 공드리)—두 영화는 정반대의 온도와 질감을 지니고 있으나, 결국 인간의 마지막 경계, 몸과 의식의 관계를 같은 질문의 서로 다른 문법으로 제시한다.
1995년,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SF 영화의 사고방식을 바꾼 작품으로 남았다. 근미래의 일본, ‘사이버화’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인간은 신체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하며 살아간다.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은 거의 완전한 사이보그로, 국가기관 ‘공안9과’의 요원으로 활동한다. 어느 날 ‘인형사’라 불리는 해커가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신체를 해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쿠사나기는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신 역시 조작된 기억을 가진 존재일 수 있음을 깨닫고, 인간과 기계, 현실과 인공의 경계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공각기동대〉는 철학적 깊이와 시각적 미학이 결합된, 1990년대 디지털 불안을 가장 선명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비 내리는 네온의 도시, 기계와 살의 경계가 녹아내린 장면들은 인간이 기술 속으로 스며드는 시대의 우울을 상징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쿠사나기의 물음은 단순한 자아 탐색이 아니라, 정보화 시대의 인간 존재론에 대한 급진적 질문이었다. 기술은 인간을 확장시켰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리를 지워버렸다.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 인간은 이미 육체를 초월했다. 신체는 교체 가능한 기계 장치로 대체되고, 감각은 인공신경망을 통해 재현된다. 인간의 뇌는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으며, 기억은 데이터처럼 복제되고 삭제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완전성 속에서 인간은 전례 없는 불안을 느낀다. 쿠사나기 소령은 거의 완벽한 사이보그이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묻는다. “내가 가진 기억이 진짜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그녀에게 기억은 인간으로 남기 위한 마지막 증거다. 하지만 그 기억이 해킹과 조작의 대상이 되는 순간, 자아의 근거는 사라진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쿠사나기의 세계에서는 “나는 연결된다, 고로 존재한다”가 새로운 명제가 된다. 의식은 더 이상 개인의 내면에 머물지 않고, 네트워크의 일부로 분산된다. 기억은 정보로 환원되고, 인간은 자아를 잃은 데이터의 그늘 속을 떠돈다.
흥미로운 점은, 오시이 마모루가 이 모든 철학적 실험을 ‘육체의 부재’를 전제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신체는 단지 의식의 ‘그릇’으로만 존재한다. 쿠사나기의 몸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니라, 의식이 잠시 거주하는 껍데기다. (그래서 제목이 Ghost in the ‘SHELL‘이다.) 감독은 육체를 타자화된 도구, 교체 가능한 외피로 처리함으로써 ‘의식과 기억 그 자체’에 집중한다. 영화는 육체의 감각이나 물질적 경험을 탐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순수 의식의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런 점에서 〈공각기동대〉는 의식의 순수화 실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실험은 완결되지 않는다. 의식이 몸을 버린 순간, 그것은 방향을 잃는다. 감각이 없는 기억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감독은 육체를 지움으로써 오히려 육체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사유는 훗날 후속작 〈이노센스〉(2004)에서 한층 더 밀고 나간다. 거기서 그는 인간과 인형의 경계를 다시 불러오며, 의식이 물질을 떠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재차 묻는다. 만약 〈공각기동대〉가 ‘의식이 몸을 초월하는 세계’를 제시했다면, 〈이노센스〉는 그 초월 이후 남겨진 공허를 직시한다. 오시이 마모루는 결국 인정한다. 의식은 몸을 떠날 수 있지만, 몸 없는 의식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결국 〈공각기동대〉는 기술이 만든 완전한 신체의 환상 속에서, 인간이 ‘살아 있음’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메를로퐁티가 말했듯, “의식은 몸을 통해 세계에 닿는다. 우리는 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존재’한다.” 오시이 마모루의 세계는 이 명제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몸이 사라진 순간, 의식은 길을 잃는다. 기억은 남지만 감각은 사라지고,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단지 네트워크 속의 흔적이 된다. 〈공각기동대〉는 의식을 절대화함으로써 오히려 육체의 부재를 드러내는 역설적 세계다.
2004년,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오브 더 스팟리스 마인드〉는 기억과 감정, 그리고 사랑의 본질을 가장 섬세하게 포착한 영화 중 하나로 남았다.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는 인간의 내면을 미로처럼 구성하며, 한 개인의 의식이 기억을 따라 붕괴하고 재조립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내성적인 조엘(짐 캐리)과 자유분방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관계의 끝에서 서로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한다. ‘라쿠나(Lacuna)’라는 회사의 기술을 통해 그들의 기억은 하나씩 삭제되지만, 삭제의 과정 속에서 조엘은 오히려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되살려내며 저항한다.
〈이터널 선샤인〉은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부조리극이자, 망각의 실패에 대한 찬가다. 파편화된 시간, 뒤섞인 꿈과 현실, 삭제된 기억 속에서도 다시 이어지는 사랑. 공드리는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비합리적이며, 동시에 얼마나 신체적인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세계에서 기억은 데이터가 아니라 감정의 질감이다. 기억을 지워도 몸은 그것을 잊지 않는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인간의 감정과 의식이 신체적 반응의 누적된 흔적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심박수, 근육의 긴장, 손끝의 떨림 같은 감각의 총체가 곧 기억을 구성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에게 다시 끌리는 이유는 바로 그 물질적 흔적 때문이다. 그들의 몸은 이미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도 이 영화는 흥미롭다. 억압된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심층으로 숨어 반복 강박의 형태로 되살아난다.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그 반복의 미학이다.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의 패턴은 남는다. 망각은 실패하고, 사랑은 순환한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인간이 바로 그들이다. 잊어도 다시 사랑하고, 지워도 다시 찾아가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공드리의 영화는 몸이 기억을 복원하는 세계다. 기억은 뇌 속 정보가 아니라, 신체 전체에 새겨진 감각의 패턴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공각기동대〉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다. 전자는 몸을 잃고 의식을 강조하지만, 후자는 의식을 지워도 몸이 그 흔적을 되찾는다. 기억은 전자에서는 ‘데이터의 그림자’로, 후자에서는 ‘살의 잔향’으로 남는다.
조엘이 말한다. “이 기억을 그냥 두고 싶어.” 그 말은 단순한 회한이 아니라, 인간의 선언이다.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기억은 상처이자 생의 증거다. 공드리는 그것을 부드럽고도 잔혹하게 보여준다.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결국 다시 몸의 언어로 되돌아오는 과정이다.
두 영화는 서로 반대편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기억은 정신의 산물인가, 육체의 흔적인가? 〈공각기동대〉는 기억을 데이터로 환원하며 의식을 탈육체화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아의 붕괴다. 반대로 〈이터널 선샤인〉은 기술로 기억을 지우지만, 몸은 끝내 그것을 기억한다. 의식이 육체를 떠날 수 있다고 믿은 세계와, 육체가 의식을 되찾는 세계. 둘 다 의식과 몸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불교의 ‘무상’ 개념은 이런 사유를 확장시킨다. 모든 것은 변하고, 기억 또한 흐른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만 존재가 가능하다. 〈공각기동대〉의 냉정한 초월과 〈이터널 선샤인〉의 따뜻한 순환은 결국 같은 진실의 두 얼굴이다. 완전한 기억도, 완전한 망각도 없다. 인간은 그 사이의 흔들림 속에서 살아간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코나투스’—자신을 보존하려는 욕망—의 존재라 했다. 기억 또한 그런 욕망의 형식이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기억을 만든다. 그러나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결국 우리를 떠난다. 기술은 기억을 저장하려 하지만, 몸은 기억을 느끼며 저항한다. 의식은 데이터로 모사될 수 있지만, 감정은 살과 피로만 존재한다. 기억은 정보가 아니라, 물질적 온도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와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은 서로 다른 길 위에 선 두 개의 의식이다. 한쪽은 몸을 잃은 인간이고, 다른 한쪽은 몸이 의식을 되찾으려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품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언제나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린다.
쿠사나기는 기술의 심연 속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조엘은 인간의 고통 속에서 자신을 잊고 싶어 한다. 하나는 초월을 꿈꾸고, 다른 하나는 회귀를 택한다. 그러나 두 세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쩌면 단 하나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의식은 몸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몸을 완전히 떠나지는 못한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그리움은 남는다. 그리움은 데이터로 변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살 속에 남은 미세한 온기,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의 떨림이다. 쿠사나기의 공허와 조엘의 회한은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같은 온도를 가진다. 둘 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감각의 잔향’ 속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우리는 그 사이에 있다. 기술과 감정, 기억과 망각, 의식과 몸 사이의 어딘가. 그곳에서 인간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완전히 초월하지도,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을 조정하고 번역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의식은 몸을 떠날 수 있을까? 아니면 몸이 먼저 의식을 만들어낸 것일까? 둘 중 어느 쪽이든, 우리는 그 경계의 흔들림 속에서만 자신을 느낀다.
그 흔들림이 곧 인간의 방식이고, 그 모호함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마지막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