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통제의 신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캐서린 비글로우의 신작이다. 전작 <허트 로커>와 <제로 다크 서티>에서 전쟁과 폭력, 국가 권력의 이면을 탐구했던 그녀는 이번에도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균열을 응시한다. 영화의 설정은 단순하다. 어느 날, 정체불명의 핵탄두 미사일이 발사되어 미국을 향해 날아온다. 몇 분 후면 시카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처음 접하게 된 군인들, 정치가들, 백악관은 혼란에 빠지고, 대통령은 ‘핵반격’을 지시할지 말지의 기로에 선다.
핵폭탄이 시카고에 떨어지기 직전, 대통령은 헬리콥터 안에 있고 그 옆엔 한 장교가 있다. 그 장교는 언제나 ‘핵공격 매뉴얼(블랙북)’을 들고 대통령 곁을 지키는 인물이다. 핵 미사일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미국에 적대적인 모든 나라들이 군대를 움직이고 있다. 합참의장은 통신을 통해 이대로면 미국이 통제 불능에 빠지고 모두가 공격을 해올거라고 강조한다. 그러기 전에 먼저 공격을 하는게 최선이라고. 잠재적인 적 모두에게 핵공격을 하자고.
감독은 단지 핵무기 시스템의 불안정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영화는 훨씬 더 넓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 이 세계를 통제하고 있는가? 기술, 정치, 제도, 시장, 언론, 인공지능, 알고리즘—모두가 “우리가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현대 문명은 ‘예측’과 ‘대응’의 언어로 세계를 설계해왔다. 위기관리, 리스크 통제, 효율적 시스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데이터.
하지만 영화는 묻는다. 정말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손 안에 있는가? 핵미사일 발사라는 극단적인 사건은 그 믿음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장치다. 단 한 번의 오작동, 한 번의 오해, 한 줄의 코드 오류가 전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위험은 단지 과학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의 문제다. 대통령의 말처럼, “준비되어 있음”이란 결국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장치일 뿐이다.
핵폭탄이 미국에 떨어지는게 확정되는 순간 합참 의장은 ‘상당한 시간과 전문성을 투입해 준비해 놓은’ 대응 옵션들이 정리된 블랙북을 꺼내며 대통령에게 말한다.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대응 방안을 선택하라고. 그 책 속의 선택 사항들은 미국의 입장에서 ‘타당’할지 몰라도 인류의 입장에서는 ‘재앙’ 그 자체이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시스템에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대비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믿음은 문명의 심장부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자기최면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만 보는 한, 우리는 기술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오늘날의 정치·경제·사회 제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그 시스템들을 흔히 ‘중립적’이라 부르며, 인간이 잘만 다루면 문제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 그것들은 중립적이라기보다 양면적이다. 시스템 자체는 철학적이거나 정치적 입장을 갖지 않는다. 그 안에는 단지 명과 암, 효율과 불안이 공존할 뿐이며, 상황과 환경에 따라 어느 쪽이 드러날지가 달라질 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일정 부분은 통제할 수 있지만, 결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현대의 정치 시스템은 통제를 위해 존재하고, 경제 시스템은 불확실성을 예측하려 하며, 언론과 데이터는 진실을 관리하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결국 제어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통제의 가능성을 믿어야만 견딜 수 있었고, 그 믿음이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믿음이 불안의 근원이 된다.
기술은 한때 제어의 도구였으나 이제는 통제의 주체가 되었고, 정치는 질서의 수단에서 자기보존의 기제로 변했으며, 경제는 풍요를 약속하던 시스템에서 인간을 효율 단위로 환원시키는 체계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문명은 거대한 알고리즘처럼 작동한다. 국가는 데이터를 통해 국민을 관리하고, 기업은 알고리즘으로 욕망을 조정하며, 개인은 스스로를 시스템의 일부로 조율한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더 완벽하게 ‘준비된 세계’ 속에 사는 듯 보이지만, 실은 단 한 번의 예외, 단 한 번의 우연으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는 구조 속에 있다. 그것이 기술이 제도로, 제도가 신화로 변한 세계의 아이러니이다.
마크 뷰캐넌은 『우발과 패턴』에서 이렇게 썼다. “모래더미 위에 놓인 한 알의 모래알이 산사태를 일으키듯, 거대한 붕괴는 이미 켜켜이 쌓여온 불균형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 문장은 오늘의 문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만든 시스템들은 모두 복잡한 상호의존 위에 놓여 있다. 금융, 에너지, 통신, 안보, 생태—하나의 연결이 끊어지면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한다.
즉, 우리는 이미 임계 상태(Critical State)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여전히 통제의 언어로 세계를 해석하려 한다. 위기를 관리하고, 시장을 조정하고, 데이터를 보정하며,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안정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불확실성의 깊이를 덮는 얇은 포장지에 불과하다.
에드워드 윌슨의 말이 이를 정확히 짚는다. “우리는 석기시대의 감정을 가지고, 중세의 제도 속에서 살며, 신과 같은 기술을 휘두르고 있다.” 이 불균형이 바로 문명의 불안의 본질이다. 인간의 감정은 여전히 원시적이고, 제도는 낡았으며, 기술은 이미 신적 권능의 수준에 이르렀다. 이 세 층위의 불균형이 바로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즉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집이다.
영화 속 시각적 장치들—끊임없이 울리는 경보음, 데이터가 쏟아지는 스크린, 시한이 다가오는 시계—이 모든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망(Network)’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 망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노드에 불과하다. 한 사람의 판단, 한 기관의 오류, 한 알고리즘의 결함이 전체를 뒤흔든다.
하이데거의 경고는 이제 정치철학적 의미로도 확장된다. 우리가 기술을 도구로 보는 한, 우리는 기술의 노예가 된다. 우리가 제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제도는 인간을 통제한다. 우리가 시장을 조절한다고 믿는 한, 시장은 우리의 욕망을 조절한다. 우리가 언론을 신뢰한다고 믿는 한, 언론은 우리의 생각을 재구성한다. 즉, 통제의 신화는 스스로를 강화하는 구조다. 인간은 더 많은 통제를 위해 더 많은 기술을 만들고, 더 정교한 시스템을 설계하지만, 그 결과는 더 깊은 무력감과 불안이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철저히 냉정하다. 미사일이 날아오는 긴박한 순간에도, 문제는 ‘버튼을 누를 것인가’가 아니라, ‘누른다고 해서 정말 제어할 수 있는가’이다.
근대 이후 인간은 통제를 가능케 하는 존재라고 믿어왔다. 자연을 수학화하고, 사회를 제도화하며, 감정을 데이터화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오른 존재’로 착각했다. 그러나 그 오만은 수차례 통제불능의 사태로 무너져왔다.
근래 가장 대표적인 예가 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몇 년 전의 코로나19 팬데믹이다. 사후에야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순식간에 세계로 번져갔는지 분석할 수 있었지만, 그 순간 인간은 거의 아무런 대응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근대 이전에도, 근대화 초기에도 유사한 사건은 있었다. 14세기의 흑사병, 1929년의 대공황은 모두 통제의 신화가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붕괴는 지역적이고 한정된 파국이었다. 당시의 세계는 아직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삶의 의식주가 모두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이기 전이었다. 자급자족에 가까운 경제 단위들이 존재했고 고통스러웠을지언정 어떻게든 각자 살아남을 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다르다. 하나의 금융 시스템, 하나의 공급망, 하나의 네트워크가 지구 전체를 엮고 있다. 어느 한 축이 무너지면, 우리의 하루가 전 지구적으로 무너질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영화 속 한 발의 미사일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은 그 상징적 정점이다. 그 극단적인 예가 핵무기일 뿐, 우리는 알지 못하는 곳에서 어떤 불씨가 이미 조용히 타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크 뷰캐넌이 『우발과 패턴』에서 말했듯, “지진이나 산불은 예측이 아니라 누적의 결과다. 지반 어딘가에 압력이 쌓이면, 어느 지점이든 진앙지가 될 수 있다.” 일정 수준을 넘긴 숲은 아주 작은 불씨에도 순식간에 전역을 삼킨다. 인간 문명 역시 그러하다. 이미 축적된 불균형 속에서, 불씨 하나가 전체를 태울 수 있는 상태에 있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결국 한 국가의 재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문명 전체의 실험 보고서다. 우리는 기술로 자연을 제어하고, 정치로 인간을 조정하고, 경제로 세계를 관리하려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느새 통제할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버렸다. 이제 그 시스템은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이용한다. 기술은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구조가 되었고, 정치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체계의 자기보존 방식이 되었으며, 경제는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시스템의 순환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그런 문명적 현실을 극적으로 시각화한다. 핵은 단지 상징이다. 진짜 폭발은 이미 시스템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이 만든 질서에 의해 포획되는 과정, 통제의 신화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이다.
영화의 마지막, 대통령은 옆에 블랙북을 들고 있는 장교를 바라보며 말한다. 자신은 그 책을 제대로 본 적도 없다고. 준비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 우리가 언제든 대응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그는 곧 깨닫는다.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 그 믿음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 모든 대비가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영화는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물러설 수 없는 강렬한 질문을 남긴 채 끝나버린다. 각자의 상상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하나였다. 인간 문명의 끝, 혹은 재시작.
그 모든 대비와 절차, 자신이 믿어온 통제의 신화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영화는 바로 그 깨달음의 순간을 포착한다. 인간이 통제의 장치 위에 세워온 문명 전체가, 착각 위에 서 있었다는 자각.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라, 문명의 가장 깊은 자리에 감춰진 고백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철학적 경고문이다. 문명은 지금도 “준비되어 있다”는 말을 되뇌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그 말은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는 주문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제도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세계는 언제나 인간의 이해 밖에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진정한 ‘준비’란, 통제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관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때 인간은 비로소 도구가 아닌 존재로, 시스템이 아닌 생명으로 서게 된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그 첫 장면부터 마지막 대사까지,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 이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리고 그 대답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믿어왔다. 하지만 믿음은 언제나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우리가 이제 고민해야 할 일은 통제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