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플러스의 드라마 〈안도르〉 시즌 2를 뒤늦게 보았다. 나온 지는 좀 되었지만 아껴두었던, 혹은 미루어두었던 이 이야기를 닫으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작품은 화려한 광선검의 웅웅거리는 소음도, 포스를 다루는 제다이의 고결한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영웅이 비운 자리를 채우는 것은 제국의 압제에 신음하는 평범한 사람들과, 진흙탕을 구르는 처절한 첩보전뿐이다.
이 드라마 시리즈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카시안 안도르이다. 하지만 회색빛 이야기의 중심에는 루선 라엘이라는 인물이 있다. 나는 그에게 더 시선이 갔다. 제국의 심장부 코러산트에서 우아한 골동품상으로 위장한 그는, 실상 반란군의 핏줄이자 뇌이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아군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금 확보를 위해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다. 시즌 2의 마지막, 그가 죽음을 맞이하며 남긴 정보는 훗날 영화 〈로그 원〉과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불꽃의 불씨가 된다. 하지만 극 중 반군들조차 그를 온전히 환대하지 않는다. 그의 방식은 너무나 극단적이고, 비밀스러우며, 비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결코 보지 못할 '해 뜨는 풍경'을 위해 자신의 현재를 영원한 밤 속에 가두어버린 자다.
루선 라엘의 고독하고 비정한 투쟁을 보며 책 《내일을 위한 역사》의 한 대목을 떠올린다. 역사는 말한다. "온건파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급진파가 득세해 통제 불능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불안감이 기득권을 움직인다."
1831년 자메이카에서 일어난 대규모 노예 반란(Baptist War)을 기억해 보자. 샘 샤프가 주도한 이 봉기는 처음에는 평화적 파업으로 시작했으나, 곧 사탕수수 농장을 불태우는 거대한 폭력으로 번졌다. 영국군은 이를 잔혹하게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처형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극단적 공포'는 영국 의회를 움직였다. 노예들이 단순히 굴종하지 않으며, 언제든 제국의 경제 기반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는 실질적 공포가 기득권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결국 영국은 1833년, 인도주의적 이유가 아니라 더 이상의 폭동을 막기 위한 '경제적이고 온건한 타협안'으로서 노예제 폐지법을 통과시켰다.
마틴 루터 킹의 '꿈' 역시 마찬가지다. 기득권 세력이 그의 손을 잡은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그를 거부했을 때 마주해야 할 말콤 엑스의 급진적 분노가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혁명은 역설적이게도 피와 폭력의 가능성 위에 서 있다. 루선 라엘과 같은 급진파는 정치적 의지를 실현하는 열쇠이자, 온건파의 협상력을 높여주는 지렛대인 셈이다.
이 논리는 지금 우리 앞의 가장 거대한 위기, 기후 변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거대 정유사와 기업들은 '현실적인 여건'을 들며 점진적인 변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그 '점진적'이라는 단어 뒤에는 자본과 기득권 유지를 위한 교묘한 지연 전술이 숨어 있다.
우리는 명화에 수프를 끼얹거나 도로를 점거하는 과격한 환경 운동가들을 쉽게 비난한다. 그들의 방식은 불편하고 무례하며 때로는 폭력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과격함이 없다면, 과연 정부와 기업이 온건한 환경 정책이라도 진지하게 검토했을까? 점진적이고 온건한 호소만으로는 거대한 이익의 관성을 멈추기 힘들다. 루선 라엘의 방식이 불편하지만 필요했듯, 지금의 과격한 외침 또한 멸망을 늦추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일지 모른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현실을 보면, 우리는 스타워즈의 반군보다 훨씬 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루선 라엘에게는 '황제'와 '제국', 그리고 파괴해야 할 '데스스타'라는 명확한 표적이 있었다. 반면 기후 위기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적은 구체적인 형체가 없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위태롭다. 당장이라도 죽창을 깎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은 분노가 치민다고 해도, 정작 그 창끝을 겨눌 대상이 없다. 그 힘은 곳곳에 분산되어 있으며, 어쩌면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자본주의'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인간도, 조직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처럼 스스로 증식하고 움직이지만, 총구를 겨눌 심장도, 목을 벨 수장도 없다.
더 절망적인 것은 우리 모두가 이 시스템의 부품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후 위기를 걱정하면서도 에어컨을 켜고, 불평등을 비판하면서도 내 주식 계좌의 수익률에 일희일비한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매일 소비하고 배설하며 시스템을 유지하는 가해자다. 타겟을 특정할 수 없는 혁명은 공허한 농담이 되고, 갈 곳 잃은 분노는 무력감으로 변질된다.
혁명조차 불가능한 이 거대한 무력감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픽션 속 인물들이 대신 질러주는 비명과 폭발을 보며 닿을 곳 없는 분노를 식히는 것뿐이다. 루선 라엘은 자신의 영혼을 팔아 혁명의 새벽을 열었다. 그의 비정한 결단과 희생이 스크린 너머의 나에게 기묘한 대리만족을 준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검은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마주할 때면, 다시금 서늘한 질문이 남는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우리는 어떤 루선 라엘을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 찌를 곳 없는 죽창을 든 우리는 과연 무엇과 싸울 수 있는가. 드라마는 끝났지만, 현실의 막막함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