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던지는 사람들

어느 배우의 과거와 그로 인한 소동에 대한 생각

by 두둥실


최근 한 배우의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매스컴과 인터넷 커뮤니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의 범죄 이력이 뒤늦게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여론은 순식간에 분노로 들끓었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숨기고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성공을 누렸다"는 배신감, "피해자는 평생 트라우마 속에 사는데 가해자는 TV에 나와 웃고 있다"는 박탈감이 대중의 역린을 건드렸다. 결국 논란의 중심에 선 배우는 은퇴를 발표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궁금해진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가? 왜 모두들 나서서 한마디를 하고 싶어 할까? (나를 포함해서)


물론 대중의 분노가 이해 불가한 건 아니다. 만약 내 가족이, 혹은 내가 그 폭력의 피해자였다면, 가해자가 화려한 조명 아래서 박수받는 모습을 보는 건 견딜 수 없는 고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번 사안처럼 피해자가 존재하는 범죄에서, 피해자의 시간은 고통 속에 멈춰있는데 가해자의 시간만 흘러 성공에 닿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지탱해 온 '공정'과 '권선징악'이라는 가치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인'이라면 더더욱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하지만 그 타당한 분노가 한 인간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과정,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서는 한 번쯤 차분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며 정의의 실현보다는, 우리 사회가 합의한 시스템이 무너지는 파열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바로 법과 언론의 문제다. 유럽에서는 이미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법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의 정보가 영원히 족쇄가 되어 한 인간의 현재를 옭아매서는 안 된다는 현대적 인권의 개념이다. 우리 법 역시 소년 시절의 범죄 기록을 철저히 봉인하고 보호하도록 규정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가해자를 감싸기 위함이 아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기에 저지른 한 번의 잘못으로, 그 사람의 남은 인생 전체를 일찍부터 차단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합의다. 처벌보다는 교화에, 낙인보다는 갱생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이미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한 언론은 그 봉인을 뜯어 전 세상에 전시했다. 법이 보호하기로 약속한 정보를 언론이 자의적 판단으로 까발리는 행위. 이것은 '국민의 알 권리'인가, 아니면 대중의 관음증에 기생한 장사인가? 수많은 권력층과 기득권들이 저지르는 비리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축소 보도하던 그들이, 유독 연예인의 과거 앞에서는 서슬 퍼런 정의의 사도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씁쓸하다. 법적 처벌과 사회적 합의가 끝난 사안을 다시금 끄집어내어 인민재판의 제물로 던져주는 행위가 과연 정의인지 묻고 싶다.


그렇다면 그는 배우가 되는 과정, 혹은 배우가 된 이후 법을 어기거나 타인을 짓밟은 적이 있는가? 만약 그가 성공하기 위해 불법이나 편법을 동원했고, 현재의 지위를 이용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면, 나 역시 비판의 쪽에 섰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그런 경우가 차고 넘친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주로 돈과 권력)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지키는 일부 기업인과 정치인들을 보라. 우리가 진짜 분노하고 대가를 요구해야 할 대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목적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며 성공을 탐하는 그들이 아닐까? 그것이 조금 더 ‘정의’에 가깝지 않을까?


인터넷 여론을 보면 "범죄자가 성공하는 모습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식"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라면, 차라리 법을 뜯어고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한번 범죄를 저지른 자는 평생 어떤 성공도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법전에 명확히 기입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은 말할 것도 없고, 고액 연봉을 받는 전문직이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업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것이다. "전과가 있는 자는 평생 최저 시급의 일만 하면서 근근이 먹고살아야 하며, 사회의 음지에서 조용히 지내야 한다"라고 법에 박아버리면 어떨까?

물론 범죄의 성질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사건에서 성폭력, 강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며 대중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다. 그렇다면 법에 꼼꼼한 세부 조항을 넣어보자. 폭행의 정도에 따라, 절도의 금액에 따라 사회적 진출을 막는 기간을 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폭 가해 등급 5호 이상은 향후 10년간 대기업 취업 및 방송 출연 금지', '절도 전과 1범은 자영업 월 매출 300만 원 상한 제한'. 성폭력 전과자는 평생 최저 시급 이상의 일자리를 가질 수 없도록 법으로 강제하면 어떨까? 사기, 횡령, 배임, 음주운전, 폭행 등 모든 전과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그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남의 돈을 탐한 자는 평생 기업의 임원이 될 수 없다", "폭력을 휘두른 자는 영원히 공직에 나갈 수 없다"라고 못 박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만인에게 평등한 정의가 아니겠는가?


듣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지금 대중이 그 배우에게 가하고 있는 '사회적 처벌'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웃지 못할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만약 이 법이 통과된다면, 아마도 대한민국은 멈춰 서게 될지도 모른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의석 상당수가 비게 될 것이고, 굴지의 대기업 회장실 주인들도 자리를 짐 싸서 나가야 할 테니까. (물론 현재 법상 소급 적용은 안되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여기서 나는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우리 정치권을 보자. 진보든 보수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전과 기록이 있는 정치인은 양쪽 모두에 존재한다. 그들이 선거에 나설 때마다 반대편의 공격은 끝없이 밀려든다. 하지만 그때 지지자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건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 "맥락을 봐야 한다"며 변호한다. 반면 상대편 정치인의 전과에 대해서는 그 모든 맥락을 무시하거나 핑계로 치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소 '맥락'을 중시하던 이들이 모인 게시판에서도 이번 배우의 사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입장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관점은 변한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의 전과는 '불가피한 희생'이 되고, 내가 반대하는 사람의 전과는 '영원히 매장당해야 할 주홍글씨'가 된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단순 연예인과 나랏일을 하는 정치인을 비교할 수 있나? 사회적 위치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법은 모든 이를 평등하다고 말한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면, 잣대 또한 평등해야 한다.

결국 법은 절대적이지 않다. 법전 안에는 수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고, 법으로 다 담을 수 없는 가치와 환경, 운 같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그 모든 걸 정하고, 나누고, 때로는 부수며 단죄하는 건 결국 불완전한 우리 '인간'이다.


내가 논점을 흐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핵심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편하다"는 감정과 기분은 곧바로 "옳다", "정의롭다"로 연결되지 않는다. 세상일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애매하고 모호하며,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여기엔 명쾌한 정답이 아닌 고통스러운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 모든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지금 쏟아지는 말들은 모두 저마다의 '정답' 같은 모양을 취한 채 타인을 찌르고 있다.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그들의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인간 본성의 이 아이러니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우리는 대부분 고통받는 아이를 보게 되면 마음이 아프다. (중략) 하지만 이 친절함은 우리가 서로에게 행하는 잔인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본성을 길들이고 협력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우리 내면에 최악의 속성의 씨앗을 뿌린 것도 동일한 뇌 부위에서 모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피해자의 마음에 깊이 공감한다. 그 고통을 나누고 싶어 한다. 이것은 숭고한 능력이다. 하지만 이 친절함은 곧장 '가해자'로 지목된 대상을 향한 무시무시한 공격성으로 돌변하곤 한다. 내 편(피해자)을 아프게 한 적을 처단함으로써 공감을 완성하려는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정서적 공감이 뜨거운 가슴의 영역이라면, 우리에게는 '인지적 공감'이라는 차가운 머리의 영역도 필요하다. 그 안에는 문화, 경험, 도덕,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력'이 포함된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곧바로 심판대에 세울만큼의 엄밀한 정보는 없다. 기사의 표현들도 모호한 여지를 계속 남겨두고 있다. 제대로 공개된 정보가 아니라 편법적으로, 정보의 일부만 우리에게 던져진 상황이다. 나쁜 쪽으로의 상상이 가능하다면 반대는 왜 하면 안될까?

폭로 기사에는 성폭행에도 '연루'되었다고 했고 피해자가 아닌 '제보자'가 "그는 약한 사람을 괴롭히던 가해자이자 범죄자였습니다. 그런데 경찰 역할을 맡으면서 정의로운 모습으로 포장됐죠. 이제 독립투사 이미지까지 얻었고요. 피해자들의 심정은 어떨까요? 지금이라도 자신의 과거를 반성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 '피해자들의 심정은 어떨까요?' 는 제보자의 의견이다.


그 배우가 실제 그 범죄의 주동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소년원에서의 시간을 보낸 후 뼈저리게 후회하며 새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어떨까? 그도 아니라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같이 있었거나 끌려 갔다면? 끔찍한 실수 후에 비로소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지난 수십 년간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다면?

화려한 조명 아래서 웃고 있는 순간에도, 매일 밤 잠들기 전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원망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이어왔다면? 우리가 가진 정보에는 오직 그가 그 곳에 있었다라는 사실 뿐이다. 그가 어떤 행위를 했으며 어떤 기준으로 처벌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하게 팩트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을 떠도는 폭로 글은 그가 "훔친 차량에서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고교 시절의 반(약 6개월)을 소년원에서 보냈다"고 말한다. 나는 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AI를 통해 확인을 해 보았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그대로를 복사했다.


법적 팩트 체크 (1994년 기준)

1. 혐의: 특가법상 강도강간 (1994년 기준)

당시 형법 및 성폭력 특별법에 따르면, '강도강간'은 살인에 버금가는 최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중범죄(Felony)입니다.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이 정도 강력 범죄는 소년보호사건(소년원)으로 보내지 않고, 형사사건(교도소)으로 기소되어 실형(소년교도소 수감)을 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2. 처벌: "3학년의 반을 교정기관에서 보냈다" (약 6개월)

해석: 고등학교 3학년의 절반이라면 약 6개월입니다.

법적 처분: 소년법상 수용 기간이 6개월인 처분은 '제8호(1개월 이내)'나 '제9호(단기 소년원 송치: 최대 6개월)'에 해당합니다. (제10호 장기 소년원은 2년 이내입니다.)

의미: 이는 소년원 처분 중에서도 비교적 '교화 가능성이 높거나, 죄질이 아주 무겁지는 않을 때' 내려지는 처분입니다.

3. 결론: "혐의와 처벌이 일치하지 않는다" (논리적 모순)

만약 그가 진짜로 '강도강간(성폭행)'을 저질렀다면, 1994년의 법이라 해도 고작 6개월 소년원 처분은 법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게 가볍습니다.

합리적 추론: 법원은 그에게 '성폭행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나 증거 불충분을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신 '특수절도(차량 절도)'나 '폭력(단순 가담)' 혐의만 인정되어 6개월 단기 소년원 처분을 받았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제보자의 주장 vs 법의 판단: 제보자는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법원은 "성폭행은 인정되지 않고, 차량 절도만 인정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의 법정에서는 이미 그는 '강간범'이다. 법원의 판결문보다, "그랬다더라"는 제보자의 한 줄이 더 강력한 증거가 된다. 6개월의 수감 기간이 말해주는 '가능성'은 무시되고, '성폭행'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주는 '공포'만이 확대 재생산된다.

물론 나의 이 체크조차 상상일 수 있다. 그러나 분노가 향하는 상상은 정당하고 마치 '그의 편'이 되는 듯한 상상은 왜 하면 안되는 걸까? 같은 정보를 두고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지점, 방법은 다양하다. 그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적 교실에서 장발장의 이야기를 배운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했지만, 결국 과거를 딛고 성자가 된 한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법전에 명시되지 않은 인간의 다면성을 배운다. 인간은 과거의 죄수번호로만 규정될 수 없는 복잡한 존재임을 배우는 것이다.

역사를 봐도 위대한 성인들이 무결점의 삶을 산 것은 아니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조차 젊은 시절 하인의 금을 훔치고 향락에 빠졌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인 맬컴 엑스 역시 마약 판매와 강도짓으로 감옥에 갔던 범죄자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과거의 범죄자가 아니라, 그 과거를 딛고 일어선 위인으로 기억한다.


심리학자 수전 엥겔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에 의해 현재의 우리가 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자신의 일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나는 저런 죄를 짓지 않았고, 앞으로도 짓지 않을 것"이라는 도덕적 무결함에 대한 확신이 있다. 물론 세상 모든 이들이 법을 준수하고 규범에 충실하다면 세상은 안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범위를 조금만 넓혀보면 어떨까?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떳떳한가? 무지나 말실수, 무관심으로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적은 없는가?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악의 없는 혀 놀림이 누군가의 인생을 파탄 낼 수도 있다. 입장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인간의 죄와 죄의식은 변할 수 있다. 법으로 정한 잘못과 인간적인 잘못을 무 자르듯 쉽게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는 대중의 '정의로운 분노'가 때로는 얼마나 맹목적인 광기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을 기억하는가? 당시 군중과 언론은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갔다. 명확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사회적 편견과 군중심리는 그를 매국노로 단정 짓고 광장에 세워 계급장을 뜯어내며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이번 사건의 배우는 드레퓌스처럼 무죄가 아니다. 명백한 과오가 있다.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사실까지 덧붙여 악마화하고, 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집단 린치를 가하는 그 '방식'만큼은 그때의 광장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있다.


이 집단적 광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주홍글씨》를 떠올리게 된다. 간통을 저지른 여인 헤스터 프린은 평생 가슴에 'A'라는 글자를 달고 사람들의 경멸과 모욕 속에 살아간다. 죄는 미워하되, 그 죄가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영원히 규정짓고 낙인찍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가? 한 번의 잘못으로 그 사람의 이마에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고, 평생을 그 글자 안에 가둬두려는 태도는 정의가 아니라 잔인한 형벌일 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네가 피해 당사자였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냐?"라고. 물론 내가 당사자였다면 관점은 매우 달랐을 것이다. 용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피해자에게는 분노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회복적 정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한 정의는 가해자의 파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대중이 쏟아내는 분노와 사회적 매장이 과연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오히려 대중의 관심이 가십으로 소비되고 사라진 뒤, 텅 빈 폐허에 남겨질 피해자의 고통은 누가 돌보는가.


우리는 당사자가 아니다. 제3자다. 어떤 이들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잠재적 피해자이므로 제3자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감정에 휩쓸려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법이 정한 선을 넘어 야만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제동을 거는 것, 그것이 제3자가 해야 할 몫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배우를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상황의 성급함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오히려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이전에 보았던 연예인들의 학폭이나 과거 사건에 얽힌 이야기들은 우리의 생각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학폭을 했으나 아무런 처벌 없이 잘 살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 살다가 뒤늦게 나온 이야기들로 매장되는 경우들. 법적인 처벌이 없었으니 우리가 모여 대신 응징하자는 건 어디까지 타당할까?

피해자들의 입장이 어디까지 진실이며, 그 모든 것이 진실이라 해도 그것만으로 모든 걸 판단 내릴 수 있는가? 이렇게 짧게만 말해도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우리의 감정은 즉각적이지만 올바른 답, 올바른 판단은 언제나 멀고 늦게 오며, 불분명하다. 가장 중요한 건 그걸 언제나 마음에 두는 게 아닐까.


미국의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고(Federalist Papers)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렇게 탄식했다.

"인류가 상호 적대감에 빠지는 경향이 얼마나 강한가 하면, 실질적 사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거의 공상이라 해도 무방할 더없이 하찮은 차이만으로도, 사람들은 배타적 열정에 불이 붙어 최악의 폭력적 분쟁을 일으켜왔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정확히 그렇지 않은가. 확인되지 않은 '공상'에 가까운 루머와, 법적으로 이미 종결된 일의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우리는 배타적 열정에 불을 붙여 한 인간을 사냥하고 있다. 매디슨의 말처럼,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오래된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능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그 본능을 거스르며 여기까지 진화해 왔다.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이렇게 제시한다.


"우리 종은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 때문에 수많은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협력하는 놀라운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중략) 비극을 멈추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마음속의 '우리'라는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낯선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는 대신,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기억하는 상상력. 그것만이 우리를 멸종 위기에서 구원해 주었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매디슨이 경고한 대로 적대감에 빠져 돌을 던지는 '본능'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헤어가 제안한 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그를 '우리'의 범주 안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진화'를 택할 것인가.

그 배우의 과거는 그가 짊어져야 할 짐이다. 하지만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품격을 결정하는 짐이다. 이 일은 그라는 사람 개인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껏 반복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허나 나는 우리가 조금 더 다정한 쪽을, 그리하여 끝내 살아남는 쪽을 택했으면 좋겠다. 돌을 내려놓고, 인간을 상상하는 쪽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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