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불만충이 되어버린 스스로를 동기부여하기 위해 돌아보며 쓰는 글
나는 10,000명 이상의 임직원이 근무하는 대기업 UX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지금 회사에서 일한 지 어느덧 3년 하고 2개월이 지났다. 회사생활 3,4년 차쯤 되면 이제 이 바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감도 잡히고, 대기업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이 나와 맞지 않다는 생각도 점점 커지면서 하나 둘 이직하는 동료들을 보게 된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때문에 최근에 일할 의욕이 거의 바닥으로 떨어졌음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느끼는 불만을 말해보기도 하고 혼자 전전긍긍하며 이직 시도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오래 있으면 도태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앞선 상태에선 조급함만 더해질 뿐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판단을 할 자신이 없었다. 덕질하듯 나의 일에 애정과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고, 결국 조금 더 침착하고 신중하게 나의 NEXT에 대해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지금 이 곳에서의 지난 회사생활들을 돌이켜보며 내가 얻은 것들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내가 불안해하고 걱정할 만큼의 헛된 3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동기부여도 할 겸!
큰 기업의 주니어 디자이너로 일하며 난 무엇을 얻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특히 신입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 정말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 회사엔 나와 같은 디자이너가 약 160명 정도 있다. 이들은 비슷해 보이는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일을 하고 있지만,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진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 프로젝트엔 최소 2명 이상의 디자이너가 투입되는데, 그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똑같은 디자이너일지라도 각자의 스타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사에 논리적이고 똑 부러지게 이유를 물으며 맞서 싸우는 사람, 어느 정도 수용하며 가장 현실적인 타협안을 찾아 빠르게 실행하는 사람, 잡일은 후다닥 해결해버리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만 함께 상의하는 사람, 작은 일도 공유하며 모두 함께 헤쳐나가는 사람 등 다양한 스타일의 디자이너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스타일에 정답은 없다. 그저 나와 가치관이 맞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에 대해서 나도 이런 상황에선 저분처럼 행동해야지하며 습득해왔으며, 나중엔 나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 분도 만나게 되었다. 가령 A라는 디자이너를 나의 롤모델로 삼게 되었다고 해보자.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때 스스로를 A에 빙의하여 A라면 이렇게 행동했을 거야 하고 판단의 기준을 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쪼렙 디자이너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같은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다른 역할자들'과도 친밀하게 지낼 수 있지만, '같은 역할자'끼리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공감대가 형성되고 서로 간 의지가 되는 것 같다. 고민거리를 털어놓으며 경험에서 우러나온 해결책을 공유할 수도 있고, 디자이너들끼리 스터디를 만들어 재미있는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가장 가까이에서 같지만 다른 디자이너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다.
회사에는 가장 앞단에서 회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소수의 경영진들이 있지만, 이들이 10,000명이 넘는 임직원들 전부를 파악하고 관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임원, 조직장, 셀장 등에게 그들의 역할과 권한을 위임하여 회사를 운영하게 된다. 반대로 실무진인 내 입장에선, 내 목소리를 실현시키기 위해 이 수많은 의사결정권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실무진들의 입장에서 큰 문제라고 느껴졌던 것들이 위에서 봤을 때 정말 작은 문제일 수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위에선 정말 큰 문제일 수도 있다. 어떤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문제의 크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이 사이 간극을 최소화하려면 서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실무진인 나는 셀장, 조직장, 임원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결정권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회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관련되어 있다. 즉, 그들을 잘 설득시키기 위해선 실무진으로서 지금 눈 앞에 닥친 문제 + 내가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조직에 끼칠 영향에 대해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부적으로 잘 설득시키려 하다 보면 지금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회사가 나아갈 방향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이해하려는 습관이 자연스레 길러진다. 때로는 회사의 비전과 비즈니스 골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아이콘 하나하나와 1px의 간격을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크게, 혹은 작게 볼 수 있는 시야의 근육을 단련시켜 왔던 것 같다.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위해 인사이트를 뽑아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왜 이렇게 디자인되었는지 설명하는 능력이다. 어떠한 이유로 이런 아웃풋이 나왔는지 그 인과관계에 대해 히스토리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조금 더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탄탄한 디자인 설계가 가능해진다. 또한 이후 비슷한 사례에 대해 시간을 단축하여 비효율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 능력은 특히 장기 프로젝트에서 더욱 빛나게 되는데, 다소 큰 규모의 서비스를 맡다 보면 정식 출시까지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1년 가까이 걸리기도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함께 하게 되는 이해관계자 수도 많다. 장기간 이해관계자들 간 공감대를 형성하고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설득해야 하는데, 이때 히스토리를 잘 관리하고 기억하여 전달하는 능력은 엄청난 강점으로 작용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투입되어도 결국엔 지난 히스토리들을 잘 이해하고 이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신뢰를 얻고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자잘하고 세세한 모든 디자인에 대한 히스토리를 바로바로 기억해내기는 힘들다. 때문에 정말 덜렁대던 내가, 꼼꼼하게 기록하고 정리하는 습관이 제대로 생겼다. 아이패드의 메모와 녹음 기능을 이렇게 잘 활용할 수가 없다..ㅎ 정리하면서 내 손을 한 번이라도 거치게 되면, 아무래도 원하는 내용을 빠르게 찾아갈 수 있게 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건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던 내가 Confluence나 Jira와 같은 툴을 하나 둘 배워가는 것을 보면 스스로도 대견스럽다.
종종 다른 회사 친구들이 "그 회사 분위기 어때?"라고 물으면 "부바부"라고 대답한다. "부서 by 부서"의 줄임말로 구성원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같은 회사 내에서도 부서마다 분위기나 업무 스타일에 차이가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입사 초기 인사팀으로 파견 간 적이 있었는데, 퇴근 전 선배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사로 다시 불려 와 울면서 혼났던 기억이 있다. 반면 지금 속한 팀에선 내가 출근을 늦게 하는 건지 휴가를 쓴 건지 오직 같이 일하는 사람만 알고있다. 아직도 같은 회사가 맞나 의심스럽다ㅋㅋ 동일한 직군끼리도 맡고 있는 일이 정말 다양한데, 내가 임직원들이 업무용 메신저에서 겪는 Painpoints를 찾기 위해 인터뷰를 할 때, 물류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바로 옆 셀의 디자이너는 해적들에게 약탈당했을 때 어떻게 조치를 취할지를 고민한다. 이처럼 각기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회사 외부 사람들과 일할 기회도 많다. 외부 스타트업과 협업하여 새로운 유즈 케이스를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땐 그들의 추진력과 자신감에 자극받았다. 최근에는 인도 디자이너와 개발자들과 함께 프로젝트 중인데 시차, 문화, 업무방식 모든 것에 차이가 있어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겪어온 코워커 중 가장 하드코어라고 생각된다. 그들과 같은 목표를 공유하며 일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며 노력 중인데, 글로벌 역량이라는 게 수준 높은 역량을 갖추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다양한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이라는 것을 무한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이처럼 한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협업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서로 다른 방식을 수용하여 적절한 합의점을 찾아 최선의 해결책을 도출한다는 것은, 겪어보면 결코 쉽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의외의 인사이트를 얻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인도와의 프로젝트를 마친 후엔 누구와도 협업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길 듯하다.
쓰다 보니 마치 엄청난 사람인 양 잘난 척한 것 같은데ㅠㅠ 사실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위에서 말한 것들을 계속해서 배우고 깨닫는 중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무튼 결론은 괜히 나 혼자 점점 도태되는 것만 같은 불안감에 스스로를 가두려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것! 그래도 글을 쓰면서 내가 헛된 3년을 보낸 것은 아니구나 생각 들었고, 자신감도 많이 생긴 것 같다. (뭐지 혼자 병 주고 약주 고한 것 같은 기분은?) 후다닥 마무리하자면, 일단 지금은 주어진 일 열심히 하면서 조금 천천히 다음 길을 탐색해 볼 생각이다. 뭅뭅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