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가까이 다닌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의 이직을 거치며 일해왔지만, 이곳은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사심'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곳이거든요.
사실 저는 사회생활의 목적을 꽤 오랫동안 '성장'이 아닌 '워라벨'과 '돈'에 두고 살아온 거 같습니다.
솔직히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죠. 일은 일이고, 감정은 최대한 배제한 채, 주어진 역할에서 성과만 내면 된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 저에게 이 회사는 조금 낯선 경험을 안겨줬습니다.
실적보다는 고객을 먼저 이야기했고, 숫자보다 방향을 먼저 고민했죠. 그리고 우리가 왜 이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지, 누구에게 어떤 가치를 주고 싶은지에 대해 꽤 진지한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 서비스는 런칭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저는 SNS에서 고객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일이 재미있어졌습니다. 서비스를 칭찬하는 메일 하나에도 회사 전체가 들뜨는 분위기가 좋았죠.
어느 순간, 저는 누군가의 강요없이 야근을 하고 있었고 그 시간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회사 규모가 크지 않아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았습니다. 그들 옆에 있으면 더 잘하고 싶어졌고, 주업무와 상관 없는 일들이 들어와도 '귀찮다'기 보다 '이게 도움이 된다면'이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회사를 다니는 이유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분명 돈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지만, 꼭 돈만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았던 거죠.
어느 날 갑자기 경쟁 업체가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우리보다 훨씬 큰 규모의 후발주자였죠.
그들은 정말 빠른 속도로 우리를 추격해왔고, 서비스는 정제되어 있었고 마케팅도 공격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단기간에 그들의 서비스를 알게 되었고, 우리는 그들의 모든 움직임에 예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회사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고객을 위한 고민들은 줄어들고,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모든 판단 기준이 되어버렸고 프로젝트 일정은 촉박해지고, 야근은 선택이 아닌 기본값이 되어버렸죠.
업무의 퀄리티가 아쉬워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치고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를 고객들도 느끼기 시작한 거 같습니다.
문의게시판에는 고객 불만 글이 하나둘 올라왔고,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수습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습니다. 업데이트 리스트가 내후년까지 빼곡히 채워져 있는걸 봤을 땐 숨이 턱 막혀왔죠.
여전히 우리는 각자 쌓인 일들을 처리하는데 바빴습니다.
회의는 점점 답이 정해진 상태로 진행되었고 의견을 내도 "지금은 시간이 없다."는 말로 정리되기 일쑤였죠. 솔직히 왜 회의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상태로 몇 년이 흘렀을까요. 어느새 아무도 먼저 의견을 내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 졌습니다. 창의적인 제안보다는 그냥 "네"라고 말하는 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되었죠.
열정은 눈에 띄게 식어갔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이렇게 일해도 나의 월급과 성과금은 여전히 잘 나오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하루, 한 달, 일 년을 반복하면 됐습니다.
저는 점점 기계처럼 움직이게 되었고, 중간중간 꾸준히 지급되는 성과금에 잠시 기뻐하는 것이 이곳의 생활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제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연차가 쌓이게 됩니다.
저는 콘텐츠 파트를 비교적 오랜 시간 홀로 맡아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깥에서 활동하는 같은 직무, 비슷한 연차의 사람들을 보게 됐죠.
근데 그들의 모습에서 저보다 더 깊은 전문성과 넓은 시야가 보였습니다. 분명 비슷한 시간을 일했는데, 우리가 쌓아온 것들이 꽤 달라보였죠.
저는 다음해 업데이트 리스트를 바라보며, 어쩌면 내년도 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이곳에 더 오래 머문다고 해서 내가 더 단단해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처음으로 들었던 거 같습니다.
점점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경력이 쌓인다는 건, 이전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후임과 명확한 업무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성장할 기회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일하던 마케팅 실장님은 '변화'를 반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디어를 제시해도 시도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과거에 성공했던 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믿음이 강한 분이셨죠.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바심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저는 지금 돈도 잘 벌고 있는데 왜 이렇게 힘들어졌을까요. 그렇게 자신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 나는 어떤 순간에 가장 몰입하는 사람인지
*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좋은 에너지가 나오는지
* 어떤 가치를 가진 조직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지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지금 이 회사에선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끝까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것. 이 질문들을 외면한 채,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회사를 나왔습니다.
딱히 불행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회사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싫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바라볼 땐 배부른 고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곳에 더 머문다고 해서 내가 더 단단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사라졌을 뿐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잘 버티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거 같습니다.
앞으로의 길이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제 단순히 버티기 보다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왜 제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느꼈죠.
이번 선택이 정답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질문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에서는 자신에게 꽤 솔직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다시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당신에게도 이 마음이 닿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