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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by 전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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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 85/100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ß eine Welt zerstören.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 - 「데미안」


어지러운 장면들과 난해한 은유들.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영화인 건 확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입맛에 맞았던 영화였다. 여태껏 본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인생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인생을 마주 보고 받아들이겠느냐 아니면 도피하고 자신이 만든 세계에 살겠느냐.


우선 주인공 이야기. 병원 화재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주인공은 아버지의 재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건 어쩌면 그의 아버지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는 문제다. 아내의 죽음을 잊지 못한 채 아내와 똑 닮은 처제와 결혼하는, 어찌 보면 아내의 모조품을 만들려는 것과도 같은 그의 행동은 주인공에게 상처를 입힌다.

주인공은 늘상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하며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새어머니를 남처럼 호명한다. 이러한 태도는 주인공을 편하게 해 주기는커녕 더 큰 슬픔과 고독으로 침잠하게 하고 만다. 마치 자신의 머리를 돌로 찍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을 괴롭힌 아이가 자신을 돌로 찍었다고 거짓말할 정도로 못되지도, 사실 자신이 그리하였다고 고백하지도 못할, 그렇다고 자신에게 떳떳하지도 못한 주인공의 모습. 주인공은 자신을 마주 보지 않은 채로 자꾸만 고독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전형적인 사춘기의 특징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살아온 세계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럽다. 때로는 이를 거부하려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변화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아기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깨달아야 한다. 어머니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새어머니를 가족으로 포용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나야만 한다. 그러나 종종 사춘기 아이들은 자신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어른인 척, 강한 척하며 내면의 공포를 숨기고는 한다.


이후에 들어간 탑 속 세계는 주인공이 자신의 두려움과 공포를 맞이하는 곳이자 어머니에 대한 결핍을 해소하고 새어머니를 받아들이는, 어찌 보면 내면의 혼란을 정리하는 곳으로 비추어진다.

무덤에서 만난 키리코. 키리코와 함께 잡은 물고기. 그 물고기의 내장을 먹고 떠오르는 와라와라들. 나츠코가 아이를 낳는 산실. 이것들은 전부 생명의 탄생을 은유한다. 반면 녹아버리는 어머니의 가짜 형상, 이들을 잡아먹는 펠리컨, 히미의 불꽃에 맞고 죽어가는 펠리컨, 주인공을 잡아먹으려는 잉꼬들, 그리고 나츠코와 주인공의 사이를 갈라놓아버리는 종이의 폭풍. 이것들은 전부 죽음, 즉 주인공이 가진 공포,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파생된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들을 조명한다.

자신의 공포를 마주하고 이에 맞서는 서사가 진행되며 주인공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진다. 대사가 점차 길어지고, 감정을 드러내고, 나츠코를 어머니라 부른다. 내면의 혼란을 정리하고 닫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공포를 마주하였기에 이루어진 내면의 성숙. 히미는 마히토에게 잼이 듬뿍 발라진 토스트를 건넨다. 잼 병에 쓰여진 문구, jam tomorrow, 내일의 잼. 루이스 캐롤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내일의 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는 미래의 행복을 뜻한다. 마히토에게 있어 어머니의 음식을 먹는, 히미가 건네는 잼이 듬뿍 발라진 토스트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먹는 것과 동치의 관계일지 모르며, 계속해 갈구했던 어머니에 대한 결핍을 조금이나마 해갈하는 기회가 된다.

왜가리는 떠나며 말한다. 점차 잊힐 것이라고. 다들 그런다고. 내게는 이 말이 상처받고 이를 극복하며 성장해 간다면 어느샌가 상처는 아물고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고, 모두가 그리하다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반면 주인공의 조상과 탑 속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자꾸만 침잠한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큰할아버지는 돌을 쌓아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세계는 완벽하며 완벽한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이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 그 세계는 먹이가 부족해 굶주린 펠리컨들이 아이들로 잉태될 와라와라들을 잡아먹다가 결국에는 히미의 불꽃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던 잉꼬들은 파시스트들이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악함'으로 비추어진다. 그러나 그들 하나하나의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이 정말로 악하다고 우리는 단정할 수 있는가? 하나하나가 악하지 않은데 왜 그들은 악한 존재가 되었는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세계는 불안하게 지탱되고 있다. 이를 지키려는 노력은 결국 멸망을 늦출 뿐이며 불행을 심화하기만 한다. 무너졌어야 할 돌무더기들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그 헛된 노력. 그것이 불행을 낳는다.

하야오는 큰할아버지라는 인물에 구세대의 잔재, 혹은 늙어버린 관료제의 산물을 미메시스 했다. 구시대의 것들을 과감히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 그것이 결국 무너져야만 하는 세상임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그것을 지키려 하는 것. 그러한 아집이 탑 속 세상을, 나아가 작중 배경인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싶다.

대왕도 마찬가지다. 성급하게 쌓아 올린 돌무더기가 무너지려 하자 이를 내리치고, 결국 세계는 붕괴되기 시작한다. 마치 일제의 진주만 공습 같다.


이러한 탑과 큰할아버지의 성질은 개화기 일본의 모습 또한 은유한다. 쿠로후네처럼도 보이는 검은 돌로 인해 세워진 탑. 지식인이었던 큰할아버지는 신문물인 탑의 가치를 깨닫고 그 주변에 건물을 세우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큰할아버지마저 사라지자 사람들은 탑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것은 당시 하나의 혁명적이었던 사상과 문물이 물밀듯 들어옴과 동시에 일본 사회가 겪은 큰 혼란을 의미한다. 이러한 혼란은 마히토의 사춘기라는, 과도기적 성질을 가진 시기와도 맞물려, 혼란스러운 시류에 대한 하야오의 생각을 혼란스러운 시기인 사춘기로 성공적으로 은유해 냈다.


왜가리와 펠리컨들, 그리고 앵무새들. 작중에는 이상할 정도로 새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탑 속의 인물들이다. 탑은 이른바 '새의 세계', 즉 '알'인 것이다.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이 떠오른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인 동시에 투쟁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지내온 세계를 부수고 나간다는 것은 미래를 향한 희망찬 약동이자 미지의 공포를 향하는 첫걸음이다.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영화를 통해 던져오는 질문은 과연 그대들은 그대들을 직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 과감히 지난날들을 탈피하고 공포로부터 벗어나 성숙을 이루어낼 수 있냐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 전문 성우 혹은 배우가 아닌 사람들이 성우진을 맡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때때로 미숙한 연기력이 몹시 걸리적거린다.


관람 일자


2023/10/25 - 메가박스 더 부티크 목동현대백화점 더부티크(리클라이너 108호)

2023/11/02 - 메가박스 목동 3관

2023/11/03 - 메가박스 더 부티크 목동현대백화점 더부티크(리클라이너 107호)

2023/11/08 - 메가박스 검단 2관

2023/11/10 - 메가박스 검단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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