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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7)」

by 전율산

「Marjorie Prime」 50/100


기억이라는 건, 뇌 속의 퇴적층과도 같아서 파보면 거기 있음을 알겠지만…

Memory, sedimentary layers in the brain. You get in, you know it's there …

존 (Jon) - 「Marjorie Prime」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는 마조리,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위해 준비된, 그녀의 남편 월터의 젊은 시절을 흉내 내는 인공지능, 프라임. 마조리는 그런 월터 프라임에게 의존하고, 마조리의 딸 테스는 그런 어머니의 변화가 생경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조리는 사프란으로 염색된 깃발이 나부끼는 공원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난 50년간 입에 올리지 않던 죽은 아들을 찾고, 테스는 거실 테이블에서 줄리가 마조리에게 건네준 성경을 발견한다. 마조리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었기에, 그녀는 월터 프라임과 간병인 줄리가 마조리의 약해진 부분을 파고들어 이용한다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거리감을 느낀다.

테스보다 프라임에게 호의적이었던 남편 존은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의 죽은 아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비단 마조리뿐만 아니라 월터에게 있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참척의 고통이었음에도 불구, 월터 프라임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분노하며 프라임도 취한 상태 같은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후 영화는 월터가 마조리에게 청혼하던 장면에 대한 회상, 일가족이 바다로 즐거운 나들이를 나선 모습, 마조리의 생일 파티 장면 등을 보여주지만, 음악이 어쩐지 음산하다. 이어지는 장면, 줄리가 집을 떠난다.


테스와 마조리가 대화하고 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장대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다. 마조리가 앉아있던 안락의자에는 이제 테스가 있고,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이 있던 자리에 있다. 그리고 푸들 토니에게는 털이 아니라 머리칼이 있었다 했던 그녀는 이제 토니의 모래 묻은 털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조리는 죽고 테스가 마조리 프라임으로 그녀를 불러낸 것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가 아는 마조리와는 비슷하면서도 핵심적으로 다르다. 그렇기에 테스 이외의 다른 자식이 있었냐는 그녀의 물음에 테스는 자신밖에 없었다고 대답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에게 묻는다.


테스

 왜 제게 있어서 마조리는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하세요? 왜 이게 제가 그녀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방식일까요?

 Why do you think this is the Marjorie for me? Why this is the way I want to remember her?


마조리 프라임

 나 말이니?

 Me?


테스

 제 말은, 저는 제가 어렸을 적에 당신을 알았던 모습으로 당신을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았겠냐는 말이죠. 근데…

 I mean, you'd think that I would want to remember you the way you were when I was a little girl, but …


마조리 프라임

 나도 네게 답을 알려줄 수 있더라면 좋겠구나 아가야.

 I wish I could tell you, sweetheart.


테스

 아가라는 말 쓴 적 없어요.

 You wouldn't say "sweetheart."


마조리 프라임

 네가 너와 나에 대해 충분히 말해주지 않았잖니. 우린 가까웠니?

 You haven't said much about you and me. Are we close?


테스

 나쁜 엄마는 아니었죠. 하지만 저는 어떤 사람들은 부모처럼 행동하다가도 언젠가는 어른 대 어른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시점이 있다고 봐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게 없었던 것 같네요.

 You weren't a bad mom. But I think some people have a point where their parents stop being their parents to them, and you speak to one another as adults. I don't think we ever had that.


마조리 프라임

 아마도 그게 내가 왜 네가 생각하는 마조리인지에 대한 이유겠지. 아마도 나는 네가 건네고 싶은 말이 남아있는 마조리일 거야.

 Maybe that's why I'm your Marjorie. Maybe I'm the Marjorie you still have things to say to.


Marjorie Prime 01:00:01


회상 장면, TV에는 마조리가 이야기했던 사프란으로 염색된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이 나온다. 마조리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며 월터를 껴안는다.

테스는 어머니의 유품들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왜 자신의 젊은 아버지의 형상을 한 프라임에 대해 적대적이었는지 숨겨온 속내를 내비친다.


존은 테스와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구도가 익숙하다. 프라임들이 앉았던 자리에 테스도 앉아있다. 테스는 마다가스카르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자신의 딸과 절연하고 그녀에게는 남은 희망이 없었다고 존은 이야기한다. 존은 테스의 손녀와 테스 프라임을 인사시킨다. 손녀의 이름은 마조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조리는 어른이 되었고 존은 아주 늙었다. 거실에는 프라임들만이 남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프라임들이 존을 찾는다. 존은 없다.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데미안을 알지 못한다. 토니도 둘이나 있었다는 것 또한. 월터가 데미안에 대해 설명하자 테스와 마조리도 데미안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마조리가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How nice that we could love somebody) (Marjorie Prime 01:34:52)." 그 말에 뒤이어 모두의 회상이 짧게 흘러가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의 초반부, 피아노를 치며 존은 말한다. "기억이라는 건, 뇌 속의 퇴적층과도 같아서 파보면 거기에 있음을 알겠지만… (Memory, sedimentary layers in the brain. You get in, you know it's there …) (Marjorie Prime 00:25:32)." 그러나 곧 테스는 이에 대해 반박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떠올릴 때 우리는 기억을 떠올리지.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기억일 뿐, 원본이 아냐. 그래서 기억은 언제나 점차 난잡해지지, 마치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절대로 신선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아. (When you remember something, you remember the memory. You remember the last time you remember it, not the source. So it's always getting fuzier, like a photocopy of a photocopy. It's never getting fresher or clearer) (Majorie Prime 00:25:58)"라고 말이다.

우리가 떠나면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으로 재구성된다. 마조리가 기억하던 토니의 머리카락과 너무나 아낀 나머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마조리의 일부 또한 함께 영영 사라지게 만든 데미안의 죽음마저도 마조리 프라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퇴적층(sedimentary)처럼 기억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주변 인물들의 복사본(photocopy)을 복사하고 있는 것뿐, 원본(source)가 될 수 없기에 그들은 언제나 "더욱 사람답게 (More human) (Marjorie Prime 01:02:28)" 되고 싶을 뿐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 복사본들이 모여 마치 원본인 것인 양 대화하는 장면은 몹시도 공허하고 또 불쾌하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 소꿉놀이하는 아이마냥 복사본을 들고 원본이라 생각하고 있기에, 그것을 아는 척할 뿐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하더라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우리는 다시 원본을 되찾을 수 없다. 그저 무한한 기억의 복사와 붙여넣기를 거듭하며 최대한 원본과 동일한 복제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거듭할 뿐.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가 기억하는 월터,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가 기억하는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존이 기억하는 테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입장에서 각 프라임들은 제3자의 시선에 입각하여 구축된 존재들이지만 당사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이 기억하는 그이의 모습일 것이기에. 그리고 그것이 원본이 아닌 편린일지언정 그 모습마저 그들에게는 그리움으로 남아있기에. 그들은 끊임없는 망각의 강 속에 침전된 사금을 찾는 것처럼 기억을 기우고 덧대는 일일지도 모른다.


관람 일자


2024/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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