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ker: Folie à Deux」53/100
순수한 진실로는 군중들을 동화시킬 수 없으며…
La vérité pure est inassimilable aux foules …
앙리프레데릭 아미엘 (Henri-Frédéric Amiel, 1821-1881) - 《일기장의 일부분 (Fragments d’un journal intime)》
우선 이 영화는 아서와 조커, 말과 노래 등의 대조적인 요소를 통해 현실과 환상(fantasy)의 경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조커는 환상입니다. 아서의 변호사는 조커가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저 거짓일 뿐이죠. 조커는 없습니다. 아서 플렉만이 있죠. 아무도 아서의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서가 다른 죄수들 앞에 서서 노래하고, 노래가 끝나자 한 죄수가 아서에게 쏘아붙이듯이 말합니다. 대답하라고요. 아서는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이미 노래로 했는데도 말이죠.
노래 또한 환상입니다. 아무도 아서 플렉의 노래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동료 죄수들도 그랬고, 아서가 사랑한 리도 그랬고, 심지어는 많은 관중들 또한 그랬습니다. 그러나 조커는 다릅니다. 조커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모두가 조커에게는 관심을 가집니다. 그렇기에 노래하는 아서는 조커가 됩니다. 군중들에게, 리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조커요.
조커는 아서가 아닙니다. 조커는 환상에 더욱 가까운 존재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처럼 아서 플렉 스스로가 만들어 낸 존재조차 아닌 군중들에 의해 신격화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서는 조커가 되었을 때 자신에게로 향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좋습니다. 아서는 이제 조커를 내면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서는 조커가 아닙니다.
아서는 약한 사람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존재죠. 아서는 재판에서 이런 농담을 합니다. "똑똑. 누구세요? 아서 플렉이요. 아서 플렉 누구? (Knock knock. Whose there? Arthur Fleck. Arthur Fleck who?)" 아무도 아서 플렉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마지막 재판이 끝나고 아서는 리에게 전화를 걸지만 리는 받지 않고, 아서는 노래합니다. 리는 받지 않죠. 그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리조차도 아서의 환상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조커는 다릅니다. 모두가 조커를 압니다. 모두가 조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자본주의의 돼지들을 처형하는 조커. 그렇기에 아서는 변호사를 해고하고 조커로 분장한 채 법정에 오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서는 한 가지 큰 착각을 합니다. 조커로 분장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는 착각. 뭐 어느 정도는 착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조커가 무슨 말을 하던지 사람들은 환호하며 경청하니까요. 문제가 있다면 아서는 조커가 아니라는 겁니다. 조커의 이야기 또한 아서의 이야기가 아니죠. 여전히 아서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아서는 겁이 납니다. 조커라는 거대한 존재를 담기에 그는 너무 작고 유약한 그릇입니다. 방청객들이 잔뜩 있는 법정에서 그는 거대한 사람이지만, 재판이 끝나고 감방으로 돌아간 그는 간수들에게도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리키가 죽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벌벌 떨기만 합니다. 이제는 아서도 자신이 조커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재판에서 아서는 조커이기를 포기합니다. "똑똑. 누구세요? 아서 플렉이요. 아서 플렉 누구? (Knock knock. Whose there? Arthur Fleck. Arthur Fleck who?)" 이제 조커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서 플렉이 되었습니다. 그는 조커라는 환상을 여기에서 끝내고 싶어 합니다.
불쌍한 아서 플렉. 사람들은 여전히 조커만을 좋아합니다. 환상에서 벗어나길 원하지 않습니다. 아서가 이미 조커이기를 포기하였지만, 군중들은 여전히 조커였던 아서를 조커로서 좋아합니다. 아서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리조차도 그렇습니다.
리는 조커 분장을 하고 법정으로 향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노래는 환상이죠. 노래의 내용 또한 사랑에 빠진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에 관한 내용이죠. 리는 관객들을 향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리는 관객들을 사랑합니다. 관객들에게 노래하지 않는다면 조커조차도 쏘아버릴 수 있죠.
조커가 법정에서 탈출하고 마침내 리를 만난 순간, 리는 노래합니다. 환상을 부릅니다. 아서는 노래하지 말고 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리는 끝끝내 말하지 않습니다. 리가 사랑하는 아서는 환상일 뿐입니다. 군중이 사랑하는 아서도 환상일 뿐입니다.
심지어 관객들이 사랑하는 아서도 환상일 뿐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혹평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엄연히 시리즈물인데다가 1편은 환상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이제는 갑자기 모든 환상을 해체해버리겠다니요. 게다가 그 모든 노래들은 뭘까요.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조커는 애초에 대중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머레이를 쏘아 죽이는 조커, 그게 그저 통쾌하기만 한가요? 머레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에 대한 조커의 반응은 정당했나요?
1편의 조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호르크하이머의 자연 폭동 개념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에 맞추어 삽니다. 무언가에 맞추어 산다는 것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누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인간 자연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에 대한 억압은 분노 감정을 축적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자연 폭동은 발생합니다. 이러한 자연 폭동은 방향성이 없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2004)>를 잠시 예시로 가져와봅시다. 그 영화에서는 고통받는 아이들이 나오는데, 관객들은 그 누구에게도 아이들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고,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아이들을 어떻게 해방시켜야 할지 어떠한 답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런 답은 모릅니다. 자연 폭동 상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모르는 채 방향성을 잃고 분출합니다.
호르크하이머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는 자연에 대한 착취를 넘어 분노 감정마저 착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분노 감정의 화살을 외부 집단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말이죠.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그랬고, 문화 대혁명이 그랬듯이요.
조커는 이러한 자연 폭동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자신을 억압하는 아서의 분노가 임계치에 달했을 때, 흔히 말해 막타를 친 대상에게 그의 분노는 표출됩니다. 그의 분노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외려 화풀이에 가깝죠. 랜들이 그에게 무슨 잘못을 했나요? 권총을 준 것? 머레이는요? 아서도 지금까지 그가 남들을 놀릴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자신이 대상이 되니 화가 난 것 아닙니까? 애초에 머레이 아서를 농담거리로 사용할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놀린건가요? 아니잖아요. 그의 폭력에는 대의명분이 없습니다. 후련한 복수극? 복수의 대상이 그게 맞나요? 아서 역시 자신의 분노의 근원을 모르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러한 아서를 착취합니다. 그들은 조커라는 가상의 페르소나를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 그렇습니다. 아서의 행동이 썩은 사회에 맞선다고 보는 것은 아서가 그런 의도에서 행동해서라기보다는 조커라는 페르소나의 의도로 해석하고 그를 내면화했기에 발생하는 오류에 가깝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조커는 부조리극입니다. 애초에 대중영화와는 거리가 있었죠. 영화가 감독의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면 실패한 영화라니요. 그렇다면 조커는 처음부터 실패한 영화였습니다. 아서는 처음부터 감정 표현에 대단히 서툴렀습니다. 애초에 사람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인데요. 그런 사람이 영웅 취급이라니. 처음부터 잘못될 운명이었던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조커이기를 강요합니다. 그를 끊임없이 착취합니다. 그러한 요구는 다시금 '자연'인 아서를 억압하도록 만듭니다. 아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조커라는 가면을 통해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얻었다'는 주장은 옳지 못합니다.
감독도 아마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영화에 대해 '조커가 감독한 것 같다'고 발언했습니다.
타란티노는 말합니다.
"전체 컨셉, 스튜디오의 돈을 쓰는 방식까지, 마치 조커처럼 돈을 써댄 거예요. 그리고 그의 최대 선물 - “하하!” 악수를 청하면 부저가 울리면서 1만 볼트의 전기 충격을 가하는 깜짝 선물 상자는 코믹북 덕후들에게 보낸 거예요. 그는 그들 모두에게 엿이나 먹으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는 영화 관객들에게도 엿 먹으라고 한 거예요. 할리우드에도 엿을 날리고요. DC와 워너 브라더스의 주식을 소유한 모든 사람에게 엿먹인거죠. 그리고 토드 필립스는 조커예요. 조커의 영화(Un film de Joker). 그래요. 그가 바로 조커예요."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것과 나쁜 영화는 구분될 필요가 있습니다. 소믈리에를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은 우선 와인의 종류를 듣고 그 와인에서 나야 하는 맛들에 집중하여 감상하게 됩니다. 그러니 소믈리에의 눈을 가리고 부르고뉴 지방의 적포도로 만든 와인이라고 말하며 샤토 디켐을 건넨다면 드라이함이 없고 설탕을 탄 싸구려 와인이라고 말하겠죠. 그렇다고 샤토 디켐이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소믈리에가 집중할 곳을 놓친 것 뿐이죠.
조커 2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가 '지루하고 난해'하게 느껴진 것은 아서가 아닌 조커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조커에서 느껴야 할 광기와 폭발력이 부재함을 지루함으로, 현실과 환상의 이분법적 구조를 난해함으로 느끼게 됩니다.
사실 조커 2의 진정한 문제점은 그런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컨셉에 매몰되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몰개성한 할리 퀸젤, 관객들을 가르치려 드는 지나치게 교조적인 태도 등이 진정한 문제점이죠.
불쾌하면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라스 폰 트리에나 아리 애스터, 데이비드 린치는 실패한 감독인가요? 관객들에게 충분한 효용을 주지 못했다고 할 수 있나요? 애초에 엿먹이는게 의도인데도요? 심지어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보면 충분한 효용을 얻은 관객들도 꽤나 많아 보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우면 실패한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터스텔라 (2014)>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죠. 그럼 인터스텔라는 실패한 영화인가요? 그뿐인가요. 장 뤽 고다르의 <언어와의 작별 (2014)>,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1986)> 등은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작가를 공부하고, 신학, 현상학 등 여러 학문들을 공부해도 이해하기 난해합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의 불쾌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불쾌함과 실패를 동일선상에 두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불쾌한지입니다. 불쾌감은 주관적이고 불쾌감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상당한 사유는 객관적입니다. 또한 영화의 맥락에 대한 포착도 중요합니다. 이는 영화사적인 맥락, 철학적 맥락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조커 1의 경우 <택시 드라이버>를 보았다면 조커가 어떤 캐릭터인지 더욱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커라는 캐릭터는 트래비스의 오마쥬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닮은 꼴이니까요. 둘 모두 그 시점에 큰 이유 없이 눈에 걸리는 사람을 죽였고, 그 결과로 우연치 않게 영웅이 되죠.
불쾌해도 좋고, 남이 좋아하는 영화를 싫다고 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해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가지요.
관람 일자
2024/09/01 - 메가박스 송도 7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