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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Oct 12. 2023

나 같은 당나귀처럼, 인간도 세상에서 사육당하네요

당나귀 EO(EO, 2022)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E) ~ 오(O)~~!!



한 번 목구멍을 쫙 벌리고 크게 소리쳐 봐요. 속이 뻥 뚫리죠? 이게 제 이름이랍니다. 전 당나귀예요. 저를 아주 사랑해 주는 어떤 서커스단 아가씨가 날 이렇게 불러준답니다.


오늘은 인간 세상에서 제가 겪은 기막힌 일들을 말해보고 싶어요. 전 진짜 험한 삶을 살았어요. 악마 같은 놈들한테 시달리느라 하도 고생을 해서 한풀이 삼아 저승에서라도 이렇게 넋두리를 해야겠어요.


그런데 제가 겪어보니 인간들도 저 같은 동물처럼 사회에서 사육을 당하더라고요. 인간은 나 같은 동물도 사육하지만 자신과 같은 종족인 인간들도 자기 입맛대로 다뤄요. 한 번 제 얘기 들어볼래요?




인간들은 참

돈냄새를 잘 맡아요.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그리곤 '급' 나누는 걸 좋아해요. 그놈의 돈이 뭔지, 인간이란 족속은 동물이든 같은 인간이든 돈냄새로 구분해 가며 끼리끼리 나누려 해요. 이런 정리벽이 타고난 본능인가요?


이 인간이란 놈들은 자라날수록 점점 돈냄새를 맡으며 돈을 벌어대니까 돈 많은 놈과 돈 없는 놈이 딱 구분되긴 할 거예요. 그리곤 마치 연기자처럼 태도가 확 달라지더라고요. 누구에게 돈 냄새가 얼마나 나는지를 감 잡으면 완전 대우가 달라지는 거 있죠? 만약 인간이 돈 가지고 사고를 치거나 땡전 한 푼 없으면 부모 자식 사이라도 얄짤 없어요. 단칼에 인연을 끊어버리더라고요. 동물한텐 돈이 필요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돈이란 게 진짜 무서운 거 같아요.


인간은 나 같은 동물도 금수저, 흙수저로 계급을 나누더라고요. 동물도 얼평, 몸평을 해대면서 이렇게 급을 나누는 거예요. 결국 동물로 돈벌이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겠죠?


저랑 친척 종족인 말은 완전 초특급 연예인 수준으로 관리를 받아요. 하지만 전 흙수저랍니다. 말보다는 몸통도 작고 종종걸음으로만 다녀야 하니 달리기도 말보다는 느려요. 말보다 키도 작으니 몸 쓰는 힘든 일만 시켜요. 서커스단에서는 채찍질을 당하면서 버텼고, 동물 구조 단체 덕분에 가까스로 탈출한 후에도 농장에서 살아야 했어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금수저 말과 친구하면서 얘네들이 사는 모습도 진짜 하루하루가 피곤해 보였어요. 말이 대자연에서 살면 비누 샤워 따윈 필요 없거든요. 근데 사육사들은 말을 자꾸 인간들 취향대로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예요. 그러면 얘네들은 꼼짝없이 부동자세로 이 기나긴 샤워를 견뎌야 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몸통에 근육이 멋지게 붙어야 하는 말들은 톱니바퀴처럼 생긴 동그란 실내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아야 해요. 이곳은 말들이 정해진 길을 절대로 이탈할 수 없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요.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계속 돌아야 하는 구조처럼요.


이러니 말들은 히스테리가 생길 수 밖엔 없어요. 품종 좋은 말일 수록 좁은 헛간에서 먹고 자면서 이런 빡빡한 스케줄을 견뎌야 하니 안쓰럽더라고요. 당나귀도, 말도, 사람도 감옥 같은 데서 오래 있으면 스트레스가 많아질 수 밖엔 없어요.




인간은

미끼를 잘 물어요.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특히 배고픈 인간일수록 미끼를 덥석 물어요. 인간들은 나 같은 동물뿐만 아니라 같은 종족인 인간들한테도 미끼를 잘 놓더라고요. 욕심에 눈이 멀면 미끼가 미끼로 잘 안 보이나 봐요. 나를 훔친 어떤 트럭 운전수가 미끼 때문에 인생이 끝난 꼴을 보니 참 딱하다 싶었어요.


이 남자는 나를 당나귀 살라미용 고기로 팔려고 했어요. 이 못된 놈은 나를 자기 트럭에 싣고 운전을 하다가 어떤 여자를 꼬시려 했어요. 성욕을 해결하려고 어떤 흑인 여자를 자기 트럭까지 유인할 때 감자튀김을 미끼로 쓰더라고요. 이 여자는 오랫동안 굶었는지 이 남자가 길바닥에 놓아둔 튀김을 나 같은 동물처럼 주워 먹으면서 트럭 안까지 들어왔어요.


결국 빵까지 허겁지겁 얻어먹는 와중에 이 운전수가 "섹스하자"라고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니까 이 여자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어요. 근데 이 운전수는 오히려 다른 미끼에 당했어요. 이 여자 자체가 미끼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이 여자가 사라지고 잠시 후 누가 몰래 이 트럭 운전사를 죽여버린 거예요.


인간들은 나를 붙잡을 때도 덫을 썼어요. 운 나쁘게도 소방관들한테 붙잡혔을 때가 생각나네요. 이 사람들은 내 목에 원형 갈고리를 씌워 버리려 했어요. 내가 으르렁댔지만 결국은 붙잡혔죠. 이놈들은 나한테 목줄을 씌워서 소방차에 묶어버리고 차를 몰기 시작했어요. 목 졸려 죽지 않으려면 난 꼼짝없이 차 속도에 맞춰 달려야 했죠. 참 잔인하죠?




인간도 동물처럼

목줄을 매달고 살더라고요.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인간들도 자기네 목줄이 일터에 묶여있더라고요. 걔네들도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면 직장에 목을 매고 살아야 해요. 이건 내가 오랫동안 도시라는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인간군상들을 관찰한 결과예요.


이렇게 감옥 같은 직장을 다니는 인간들은 다들 피곤에 찌들어 있어요. 그리고 하나 같이 폭력적이에요. 서커스단에 묶여서 근근이 살아야 하는 남자는 항상 지친 얼굴에 담배를 꼬나물곤 내 엉덩이를 그렇게 채찍질 해댔어요.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도, 날 산 채로 잡아 고깃감으로 팔아넘기려는 놈들도, 동물 우리에서 갖가지 동물들을 안락사시키는 인부도 모두 일하는 기계였어요.


나도 원래 서커스단에서 싫어도 일해야 할 때 이게 내 팔자인 줄 알았거든요. 예전에 서커스단에서 자랐던 코끼리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아기 코끼리를 잡아다가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오랫동안 말뚝에 밧줄로 묶어놓으면 처음엔 벗어나려고 날뛴대요. 하지만 이렇게 발버둥 쳐도 못 벗어난다는 걸 알게 되면 나중에 이걸 풀어주어도 도망가지 않는다네요. 이런 걸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하나요?


이 세상엔 일이 싫어도 운명처럼 여기고 생기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이 정말 많아요.  




인간은 싸우는 게

즐거운 가봐요.




전 당나귀만이 가진 팔랑귀와 큰 눈으로 오랫동안 인간들을 관찰했어요. 특히 축구라는 운동을 하는 꼬라지를 보니 참 가관이더라고요. 도대체 즐겁게 노는 건지, 아니면 싸우는 건지 모르겠어요.


축구는 재미로 하는 전쟁이에요. 아, 놀이 전쟁이라고 봐야겠네요. 인간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서 하는 게임이라는 건데요. 근데 이게 처음엔 놀이로 보이다가 나중엔 진짜 전쟁으로 변하더라고요. 자기 마음대로 경기가 안 풀리면 인간들은 짐승으로 변해요.


전 목숨이 위험해질 때만 거칠게 콧방귀를 뀌면서 뒷발질을 날리거든요. 한번 이렇게 공격하려면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니까 꼭 필요할 때만 제 에너지를 쓰는 거죠. 그런데 인간들은 기분을 풀 때도 몸에 힘을 주고 서로 싸우더라고요.


이런 놈들을 인간들은 '훌리건'이라고 불러요. 전 이놈들한테 맞아서 거의 죽을 뻔했어요. 하지만 누가 구조해 줘서 동물병원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 했어요.


제 삶이 참 파란만장하죠? 꾸역꾸역 계속 세상을 여행했지만 전 결국 먹잇감이 되었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숨을 거둔 곳은 당나귀 살라미용 고기를 만드는 곳이었어요. 힘이 없어서 이렇게 목숨을 잃었답니다.


저만 불쌍한 게 아니라 인간도 가엾은 동물이긴 해요. 도시라는 데서 돈이라는 종이조각을 미끼로 물고 평생 사육을 당하다 죽더라고요. 만약 뭔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전 인간만큼은 피하고 싶어요. 이번엔 재빨리 인간을 피하지 못해서 죽은 거니 다음 생엔 날쌘돌이 치타나 사자는 어떨까요?





*  글은 뉴스  '헤드라잇' [영화관심(關心)_Kino Psycho] 2023.10.12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iBfTuZgDzWzwblJqXbCK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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