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베리(BlackBerry, 202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업도 사람처럼 생명체와 비슷하다는 걸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어떤 회사가 태동할 때부터 망할 때까지 극적인 흥망성쇠를 거치는 걸 지켜보는 순간이다.
이 영화를 볼 때가 그랬다. 블랙베리처럼 단기간에 화끈하게 정정을 찍고, 번 돈을 다 까먹으면서 나락으로 간 회사가 또 있을까. 블랙베리에 애착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이 회사가 왜 망했는지 궁금증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재미있게 볼 만하다.
엄지 손가락과 맞닿는 오돌토돌한 키보드 감. 한때 전 세계 휴대폰 시장 과반수를 점유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키보드 폰, 블랙베리의 가장 큰 매력은 이 키감일 테다. 밋밋한 유리 화면 대신 두 손가락을 두드릴 때의 촉감은 한 번 맛보면 끊기 힘들다.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사랑한 폰으로도 유명했던 블랙베리는 암호화한 정보를 이메일과 문자 형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 보안성 및 휴대성 면에서 큰 장점이었다.
보통 기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DNA라는 단어를 쓴다. 유기체를 이루는 세포 구조를 빗대어 이런 용어로 표현하는 게 기업 가치를 설명할 때도 왠지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타 회사는 못 가진 차별화된 핵심 가치, DNA는 기업이 생명력을 갖고 시장에서 살아 숨 쉬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생명력을 사내에서는 누가 품고 있을까? 바로 창업자이다. 최초 CEO는 회사의 기대 수명을 무한대로 늘리고자 한다. 이를 위해 협업하는 초창기 회사 구성원들에게 비전을 전파하고 모두 함께 열정으로 끓어오르게 한다. 우린 단순히 돈을 버는 존재가 아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창업자의 메시지엔 생기가 돈다.
이 영화의 온도는 이처럼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진다. 그 이유는 바로 창업주들 때문이었다. 이들끼리 지지고 볶는 사연을 보면 블랙베리라는 회사가 사람으로 치면 한때 혈기왕성한 청년처럼 체력이 대단했는지, 이후 어떤 굴곡을 거치며 단명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블랙베리 창업자인 마이크 라자리디스, 더글라스(더그) 프레긴. 두 사람이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끈끈한 우정을 자랑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블랙베리라는 혁명적인 제품을 만드는 데는 함께 미쳐있지 않았을까?
남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길지 몰라도 새로운 사업을 일으킬 때는 막말로 약간 맛이 간 상태가 되어야 한다. 애플을 만든 스티븐 잡스도,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든 빌 게이츠도 이들과 비슷했다. 뭔가에 미쳐있는 상태, 이런 걸 고상한 전문 용어로 '창업자 정신'이라고 해 두자.
이 작품에서는 블랙베리에 몸 담았던 사람들, 특히 창업자들의 변모 과정을 다룬다. 회사가 성장해 감에 따라 주요 구성원들이 어떻게 극적으로 변하는지, 서로에게 실망하고 한때 동료였던 이를 배신하는 지를 그린다. 그 과정이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다. 블랙베리라는 제품 일대기처럼 말이다. 창업자 정신이 희석해지면서, 외부인을 영입해 가면서 직원들의 순수했던 열정엔 차가운 공기가 불순물처럼 스며들고, 정점을 찍었던 열기는 차갑게 식어갔다.
두 창업자뿐만 아니라 벤처 기업으로 시작했던 RIM(Research In Motions)에서 일했던 구성원들 또한 영화에서처럼 단순한 동료를 넘어 돈독함을 자랑하는 관계였을지 모른다. 블랙베리 社의 전신인 RIM은 회사 태동기 시절 허름한 임대 사무실에 터전을 마련했지만, 놀이와 일이 융합된 이 이상적인 직장이 만약 현실에도 있다면 연봉이 낮더라도 당장 이 한 몸 바치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다. 금요일마다 무비 나잇(movie night)을, 아니, 뭔가 제대로 일이 진척되지 않을 때마다 업무 중에도 함께 무비 타임(movie time)과 게임을 즐기며 사장과 직원이라는 직급 경계라는 게 전혀 없었던 RIM 사람들을 지켜보자면 이 IT 공학도 젊은이들이 내뿜는 뜨거운 공기를 느낄 수 있다.
기존 휴대폰 시장을 날려버렸던 수류탄 모양의 필살기, 블랙베리는 이렇게 탄생했다. 다만 때깔 좋게 소비자 손안에 쥘 수 있는 기계로 자리매김하게끔 대량 생산과 유통이 가능하도록 창업자들의 열망을 더 뜨겁게 달군 건 하버드 경영학도 출신인 짐 발실리였다. 그는 RIM 공동 CEO로 부임한다. 그리고 회사는 마침내 시장을 장악했다. 블랙베리는 한때 휴대폰 시장 점유율 50%에 육박할 정도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회사의 수명은 결국 사람이 좌우한다. 블랙베리는 시장을 독식할 무렵 돈다발을 생산하는 기계화된 조직으로 차갑게 변해 있었다. 어느 기업이든 동아리 성격이 진한 벤처 시기를 지나 시장을 선도할 만큼 대규모 생산과 투자를 감행하려면 성장의 진통을 겪어야 한다. 규모의 확장을 거듭하는 이 혹독한 성장기를 맞이하지도 못하고 대부분의 벤처 기업은 나가떨어진다. 불안을 감내하며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려면 자사 제품에 대한 확신, 이 물건의 필요를 설득할 만한 영업력이 필요하다. 돈 감각이 없었던 기존 두 창업자가 해낼 수 없었던 일을 외부 전문 경영자가 도맡아 해낸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RIM에 가득 차 있던 열기는 점차 식어갔다. 회사라는 조직은 성장할수록, 규모가 커질수록 점점 관료화된다. 또한 고인 물이 아닌 외부에서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한다. 신규 인력과 자본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초창기 인력들이 공유하던 창업자 정신은 점차 소멸한다. 관리해야 할 요소가 많아질수록 사람으로 생기가 돌던 조직이 기계화되는 건 필연적 과정이다. 사람도, 비용도, 제품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운영하려다 보면 직원은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닌 부품으로 전락한다.
블랙베리도 그랬다. 딱딱한 경영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성공에 도취한 채 새로운 혁신을 못했다, 안이했다 정도로 언급할 수도 있겠다. 다만 영화를 통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업자이자 CEO였던 블랙베리 경영자들은 회사를 키우며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심경 변화를 겪는다. 이들은 성공에 목말라 있었고, 중대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하며 우왕좌왕하기도 했고, 배짱 좋게 큰소리만 치다가 속으로는 밑천이 바닥나서 안절부절못했으며,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한 중상모략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신규 수혈한, 소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전문 경영인이 기술 인력들을 어떻게 야멸차게 대하는지를 보여준다. 블랙베리에서 핵심 조직은 R&D 인력이었다. 그런데 외부에서 영입된 부서장이 창업 시절부터 유지했던 사내 전통인 무비 나잇을 강제로 없애버리고 시제품 완성을 독촉하는 순간, 이 기술자들이 경영자 면전에서 질책받으며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 근무 중 노는 건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소프트한 소통과 리프레쉬를 위한 시간을 깡그리 무시하는 순간, 블랙베리는 시름시름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구성원들이 열정을 잃으면, 조직 내 부속품으로 취급받으며 때 맞춰 월급을 입금받는 부하로 전락하면 그 회사는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잃는다. 기업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기대 수명을 연장하려면 혁신은 필수다. 조직의 변화 과정은 세포의 항원-항체 반응(antigen-antibody reaction)처럼 일종의 화학 작용이고, 직원들에게 있어서는 정서적 고통을 수반하는 과도기이다.
보통 성장기에 있는 기업은 그 어떤 외부 도전에 대해서도 아메바처럼 무한대로 변형을 꾀하며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지만, 조직이 비대해지고 관료화될수록 구성원들은 변화에 대한 요구를 거부한다. 변화란 당장 돈이 안 되는 힘든 노동이라서다. 이익이 정점을 찍을수록 제각기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챙기며 실익을 따지기에 바쁘다.
하지만 기업이 존속하려면 진통을 거쳐야 한다. 외부 시장에서 생겨난 도전 요소를 기꺼이 맞이해야 한다. 세포 반응으로 치면 항원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항체 반응을 거쳐야 세포가 살아남듯, 기업도 존속하려면 위기를 미리미리 감지하고 강력한 항체를 신속히 키워야 한다.
실화에서도 블랙베리는 여러 차례 혁신을 꾀할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영인들은 단기 이익에만 급급하다 미래 먹거리를 연구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 후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하며 블랙베리를 보기 좋게 엿 먹인다. 그 이후 스마트폰 시장은 우리가 다 아는 대로다. 미국 시각 2007년 1월 8일 오전 9시 41분, 스티븐 잡스가 애플 맥월드(Macworld) 행사 중 오프닝 키노트에서 아이폰을 공개한 날은 곧 블랙베리의 사망 선고일이었다.
아마 IT 업계에서는 Yahoo, Twitter 정도가 블랙베리와 비슷한 극적인 단기 생명력을 선보이지 않았을까? 업종이 다를 순 있겠지만 이 기업들도 유연한 변화를 거치지 못했기에 결국 운명을 다했다. 중국산 저품질 양산 방식으로 블랙베리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젠 중고 마켓에서나 과거 모델 제품들을 찾아봐야 할 판이다. 키보드폰을 언젠가 꼭 써보고 싶었던 소비자 입장에서 블랙베리의 운명은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