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든 스님(The Monk and the Gun, 202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는 기분이다. 왕정을 끝내고 민주주의를 처음 도입하는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 이야기는 실화에 허구를 한 스푼 살짝 섞은 느낌이다. 불교를 믿는 왕정 국가였던 부탄(Kingdom of Bhutan)이 민주주의를 도입할 때 겪었던 일들을 소재로 한다. 실제로 부탄은 2008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현대 헌법을 제정한다. 이를 위해 2007년에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연습 삼아 모의 선거를 치렀다. 여기에 허구를 조금 첨가하니 한국 영화로 치면 마치 6.25 전쟁을 다룬 <웰컴 투 동막골(2005)> 같은 만듦새랄까?
나라가 급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부탄 국민들의 소망은 잔잔하지만 큰 울림을 준다. 부탄 국왕도, 국민도 탐욕이라곤 없었기 때문이었다. 행복지수로는 전 세계 1위를 자랑하는 국가 아닌가. 이런 나라에서 국왕은 사랑하는 국민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 통치권을 내려놓는다. 이젠 시민들이 직접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게 더 좋은 변화라는 설명을 곁들이면서. 별안간 민주주의 도입 선언을 듣고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진다.
서로 의자를 던지던데
우리도 그러자고요?
순수한 부탄 시민들이 던지는 질문에 관객은 숙연해진다. 국회선진화법이 생기기 전까지는 한국 국회의원들도 이런 난타전을 서슴지 않았다. 몸싸움, 드러눕기 등 추한 꼴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으려 결국 이런 법안까지 만든 셈이다. 국회에서 폭력을 일삼지 않았다면 유치하게 이런 법까지 만들 필요가 없었다. 도덕은 법보다 더 근본적 가치니까.
소리를 더 크게 치세요.
서로 좋아하면 안 돼요.
서로 경멸하는 것처럼,
때리려는 것처럼요.
영화 속 무대가 된 마을에서는 모의 선거를 연습한다. 공무원은 우선 정당 투표를 설명한다. 자유와 평등을 원하면 파란당을, 산업 발전을 원하면 빨간당을, 보존을 원하면 노란당을 선택하라고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다 좋은 가치 아닌가?
왜 서로를
무례하게 대하라고 가르치죠?
어떤 이는 공무원에게 묻는다. 민주주의가 2500여 년을 이어온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더 좋은 거냐고. 이에 대해 공무원은 요즘 게 옛날 거보다 더 좋은 거라고 얼버무린다. 관객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정당에 투표하세요!”라고 설득하기엔 도무지 당위성이 없어 보였다. 이들은 이미 충분히 현 공동체 속에서 삶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랬던 사람들이 선거를 연습하며 갑자기 이웃을 경계하고 경쟁하며 거칠어지니 부탄인들에게 민주주의란 마치 돼지 열병처럼 해롭게 보일 수밖에.
나무 토끼 해에
태어났어요.
이들에게 출생연도라는 개념은 머릿속에 없었다. 부탄인들에게 선거란 참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다. 유권자 등록을 하라니 집집마다 18세 이상 국민은 생년월일을 공무원에게 말해야 하지만 상당수는 이런 걸 몰랐다. 1인 1 투표를 공정하게 진행하고자 이런 사전 절차가 필요하지만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은 이런 속임수를 쓸 만큼 교활해 보이진 않는다.
일을 바로잡아야 해.
마을의 정신저 지주인 라마 스님은 갑작스러운 사회 변화에 슬퍼한다. 아마도 자유라는 미명 하에 인간이 악마성을 발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리라. 민주주의에서는 탐욕을 때론 긍정한다. 가진 자가 더 가지러는 걸 합법 하에서는 제재할 방도가 없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자비를 가르친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아마도 영화 속 스님은 부탄 사회를 지탱해 왔던 이런 철학이 무너질 위험을 감지했으리라.
스님의 제자가 총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 감독은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가 가진 병폐를 풍자한다. 어떤 미국인은 돈뭉치를 싸들고 와서 마을 사람이 가진 총을 구입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심지어 빚 청산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도 스님에게 보은 하는 게 좋은 업보를 쌓는 것이라는 믿음이 굳건했기에 나무 열매를 대가로 받고 총을 스님에게 넘긴 것이다.
값비싼 총은 결국 보름달 아래에서 운명을 다한다. 증오, 갈등, 고통을 상징하는 물건은 부탄 마을 주민들에겐 해로운 물건일 뿐이었다. 이들은 스님의 인도 하에 현명한 선택을 했다. 총을 땅에 묻고 그 위에 탑을 쌓아 집착을 끊어내는 의식을 치렀다.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은 봉건제, 공산주의 등 인류사를 통틀어 다양했다. 어떤 대안도 완벽하진 않았다. 민주주의가 그나마 제일 나은 대안이라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도입할 뿐이다. 본래 인간은 욕심을 통제 못하는 족속이라고 여겼기에 한 번 권력을 움켜쥔 자가 힘을 남용하지 않도록 고도로 개발한 정치 체계가 바로 현대 민주주의다. 국민이 믿을 만한 정치인을 직접 뽑고, 그것도 모자라 정부를 구성하는 삼권을 분립시켜서 위정자들끼리 권한을 나눠 갖고 서로를 견제·감시하도록 제도화한 결과다.
법은 도덕을 강제화한 형태다.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도리를 다들 잘 지킬 때 법은 굳이 필요 없다. 이 영화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특히 2024년 12월 이후 내란 수괴를 체포하지 못해 불안과 분노에 휩싸인 한국인이라면 잠시나마 이 이야기를 접하며 영혼을 정화하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노란당이 무려 95%나 득표한 모의 선거 결과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넘쳐나는 지상 낙원이 있다면 그곳은 부탄과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