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Mickey 17, 2025)
(영화 및 원작 소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우 세력이 어떤 정신세계를 가졌는지 누가 물어본다면 이젠 이 영화를 추천하겠다.
원작 소설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놀랐다. 이전에 책을 먼저 읽었기에 SF 장르 특유의 황량한 분위기를 예상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주인공 미키(Mickey)가 삶을 바라봤던 허무주의적 시선을 어떻게 그렸을까 궁금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놓고 보니 봉준호 감독 스타일이 뚜렷한 블랙 코미디라고 해야겠다.
소설은 주인공 미키가 혼자 읊조리는 일기 같은 형식이다. 반면 영화는 원작을 크게 3막 정도로 각색했다고 봐야겠다. ① 미키가 지구에서 보냈던 과거, ② 행성으로 향하는 우주 여정, ③ 새로운 개척지에서의 혼란. 이 과정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계화되고 있는지, 고립된 환경에서 극우 DNA가 어떻게 다수로 전파되는지. 줄거리는 대강 이 정도다. 후반부로 갈수록 새로 창작한 내용은 두드러진다. 전반적으로 재미는 있다. 하지만 웃기면서도 왠지 씁쓸한 기분이다.
전반부에선 부가 양극화된 지구가 잠깐 보인다. 미키는 이곳에서 나름 잘 살아보려 애쓰지만 그게 잘 안 된다. 급기야 사채업자에 쫓기니 어쩌겠는가. 목숨을 건지려면 딴 데로 튀는 수밖에. 돈도 빽도 없는 미키가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익스펜더블, 즉 복제 가능한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생체 정보와 기억을 따로 저장한 다음, 온갖 위험한 일은 다 시키는 새로운 노동 방식. 생명이 다하면 동일한 개체를 3D 프린팅 식으로 복제하면 되니 막 부려먹기엔 참 간편한 방법이 되겠다.
이쯤 되면 인간을 생산용 부품으로 볼 때야 가능한 발상이다. 정보가 돈이 되는 지금, 개인정보 추출 행위 중 끝판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런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늙으면 직장에서 짤리고, 이력서가 마치 제품 설명서 같은 취급을 받는 시대. 바로 지금 아닌가. 섬세한 풍자는 이런 세태를 그리며 관객을 웃긴다. 무슨 페이를 쓰면 몇 프로 할인해 준다는 플랫폼 금융 광고, 도널드 트럼프를 연상시키는 극우 통치자를 추종하는 무리들, 오늘날 우리네 현실의 축소판이다.
익스펜더블 노동자로 탄생한 미키는 한 번 죽으면 새로 태어나 미키 2가 된다. 노동 사고로 또 죽으면 미키 3이 되고, 이런 식으로 이전 버전의 기억과 경험을 축적한 미키를 무한 복제할 수 있다. 영화 속 정확한 주인공은 그래서 미키 17이다. 아니, 미키 18도 포함시켜야겠다. 둘은 생산 오류로 공존하게 된다. 그럼 미키 17과 18은 같은 인간일까? 영화에선 이 상태를 '멀티플'이라고 부른다. 인간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법적·윤리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 비상사태다.
미키 17과 18은 서로를 고유한 존재로 인식한다. 둘 모두 이 세상에서 오감을 느끼며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성격도 다르고 의사결정을 하는 관점도 다르다. 이처럼 사람은 정신과 육체가 모두 달라서 고유하고 그래서 존엄하다. 하지만 시장에서 이들은 모두 대체 가능한 노동자일 뿐이다.
'내가 미키와 다를 게 뭔가.'
문득 이런 현타가 온다. 인간이 점점 기계화 · 부품화하는 과정을 애도할 밖에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독재자 마샬 부부는 인간의 존엄 따윈 관심이 없다. 식사 자리에서 예의 상 미키가 힘든 일을 하느라 수고한다고 격려할 때 독재자 부부는 거짓 눈물을 쥐어짠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소모품으로 보는데 눈물이 날 턱이 있나. 정치인 특유의 이런 숙련된 연기를 보면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치인이 체면치례 연기를 하는 순간 미키는 먹은 걸 토해낸다. 극우 독재자 부부와 노동자가 마주하는 이 저녁 식사는 사실상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다. 미키가 구토하는 장면을 보면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의 책 <구토>가 저절로 생각난다.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는 샤르트르의 말을 따른다면 자본가에게 미키라는 존재의 본질은 노동 기계일 테다.
미키가 '참을 수 없는 자기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며 토사물을 독재자 마샬에 튀길 때 마샬은 가면 미소를 거둔다. 그는 자기 몸에 병균이 묻었다고 난리를 피며 비로소 실체를 보여준다. 함께 자리한 여직원의 우수한 유전자에 칭찬하며 임신을 장려하는 모습, "할렐루야!"를 외치며 종교와 통치 이념을 동일시하는 그의 말실수 등은 영화 속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비록 봉준호 감독 자신은 이런 말을 안 할지라도.
인간 복제를 소재로 다루는 SF 장르물은 <블레이드 러너>부터 시작해서 <아일랜드> 같은 영화까지 다양하다. 다만 <미키 17>에서는 위험이 도사리는 환경에서 꼴통 독재자가 설치는 행태가 흥미롭다. 독재자 마샬이 영토 확장을 향한 비전을 위치는 모습은 오늘날 트럼프가 오늘날 그린란드와 가자 지구를 집어삼키려는 야욕과도 비슷하다. 히틀러, 무솔리니, 도널드 트럼프, 윤석열... 세계사에서 악명을 떨친 독재자를 경험했던 나라에서는 아마도 자기네가 겪었던 악마들을 마샬이라는 인물에 투영하리라.
생존 확률이 낯은 환경일수록 극우 세력은 쉽게 출몰한다. 위험을 직감할 때 인간의 사고 체계는 양자택일 식으로 바뀐다. 간단하고 신속한 방법으로 결론을 내려야 대처가 빠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생존 본능이다. 그래서 극우 정치가는 흑백 논리 냄새가 나는 강한 메시지를 전파한다.
하지만 이런 극우적인 주장은 배타성이 강하다. 내가 주장하는 거 아니면 다 틀려, 안돼 식이다. 이러니 대부분은 극우 세력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일부는 극우에게 동조한다. 바로 생존 위협을 느끼는 이들이다. 생의 위기를 해결 못해 절박해지면 강하게 밀어붙이는 정치 세력에 호응하게 된다. 극우 정치인은 보통 단순하고 강력한 해결책을 외치기 때문이다. 자기 문제를 빨리 해결해 줄 만한 지도자, 그들 눈엔 극우가 바로 민중을 위한 애국자다!
극우 정치자와 동조자 사이엔 가학-피학 관계가 형성되기 쉽다. 결국 서로의 이익 추구를 위한 목적이다. 극우 정치인은 보통 카리스마가 있다. 이들은 단순하고 강력한 해결책을 외친다. 반면 자기 말에 찬성하지 않는 이들을 혐오하고 세를 과시한다. 추종자들은 이런 화끈한 리더십에 열광한다. 삶의 코너에 몰려 스스로를 약자라고 생각할수록 강자에게 의존하려 한다. 전지전능한 강자여, 어서 내 문제를 해결해 줘!
이런 강자-약자 구도에서는 사도 마조히즘 관계가 성립된다. 사디즘(Sadism)은 타인을 공격하고 고통을 주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모습이다. 누군가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자기 힘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이다. 반대로 마조히즘(Masochism)은 누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할수록 희열을 느끼는 면이다. 이런 사람은 강자가 정한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순종하며 누군가가 나를 지배하는 느낌을 즐기려 한다. 이 또한 나름 쾌감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내면에 품고 있다. 믿기진 않지만 사실이다. 연인끼리 싸울 때를 생각해 보자. 때때로 상대방을 혼내주고 싶을 만큼 험한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가? 때론 사랑하니 이런 일도 있다 여긴 적은 없는가? 사랑은 서로를 향한 강력한 에너지다. 이런 기운을 바탕으로 한다면 고통을 주고받는 관계라도 괜찮다고 여길 때가 있다. 특히 강자에게 의존적인 약자라면 상대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상대방이 내 모든 걸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넘칠지도 모른다. 약자가 강자의 사랑을 확인하고 맹신하는 뒤틀린 방법이기도 하다.
<미키 17>에서는 극우가 대중을 장악하는 과정을 본격적으로 그린다. 새 개척지로 향하는 비행선 안에서 통치자는 이른바 '혼종이 지배하는 지구'를 버리고 '순혈이 자손을 증식할 수 있는 땅'을 향한다. 혼종이 득실대면 제각각 떠들어대는 주장들을 조율하는 게 피곤한 법. 통치자는 화끈하게 확실한 이득을 담보하는 공약을 내세운다. 단순무식한 통치자와 그 부인이 탑승인들에게 일장 연설을 해대는 꼴을 보자면 윤석열과 김건희 부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정치 지도자를 마샬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쓴웃음이 나오는 지점이다. 계엄령(marital law)과 발음이 유사한 점을 비꼰 건 아닐까. 사실상 비행선 안은 계엄령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탑승자들은 마치 공기처럼 강압적 규칙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방송에는 지도자 부부를 미화하는 토크쇼가 나오고, 대다수는 매일 정량의 음식만 사료처럼 섭취해야 한다. 섹스처럼 욕구를 푸는 행위도 시행령으로 통제할 정도다. 혁명 전까지 저항은 없다.
새로 정착하려는 얼음 행성에서는 귀여운 크리처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인간을 처음 마주해도 죽이지 않는다. 상대를 공격한 건 오히려 인간이었다. 독재자는 새 생명체를 마주하자 이질균 절멸을 선언한다.
크리처들이 함무라비 법전 논리로 공정을 내세우며 인간을 단죄하는 방식은 전혀 파괴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인간으로 치면 팔이 없는 몸을 가진 크리처들이 뭉쳤다 흩어지는 움직임은 흡사 극지방에 사는 펭귄 무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크리처들이 소리 높여 소음을 내는 모습, 비행선 직원이 독재자의 언행을 영상 기록으로 남기는 행동 등은 저항을 비유하는 듯하다. 독재를 심판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총이 아니라 목소리를 높이고 똑똑히 기록하는 행동임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다만 워낙 다루려는 내용이 많다 보니 줄거리는 복잡하고 결국은 철학적이다. 화면마다 담은 정보량이 많다. 봉준호 감독은 꼼꼼하게도 현실을 풍자했고 SF 영화 특성상 세계관이 방대하다. 부의 양극화, 인간의 계급화, 얼음 행성에 사는 크리처와 소통할 때 사용하는 번역기, 인공적인 음식 등을 지켜보자면 <설국열차>, <기생충>, <옥자>가 절로 떠오른다. 빵 터지는 후련함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머리를 쓰며 집중하느라 피곤할 지도 모르겠다. 약자들이 연대하는 혁명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때까지 생각할 거리가 많다.
하지만 진부한 상업 영화가 난무하는 요즘, 극장에서 가장 볼 만한 게 뭐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단연코 <미키 17>이라고 말하겠다. 만약 12.3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이 영화는 절대 한국에선 개봉하지 못했을 거다. 이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