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노동자들을 위한 진혼곡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 2025)

by 녹색광선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거두절미하자면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또 다른 복수 시리즈다. 지금까지 그의 팬들이 일컫는 소위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엔 응징하려는 대상이 분명했다. 예전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신을 나락에 빠트린 그 누군가를 쫒고 벌준다. 그런데 이번엔 복수의 대상이 타자가 아닌 자신이다. 곤경에 빠진 주인공은 자신과 라이벌을 벌한다. 경쟁자는 타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대변하기에 결국 자신의 조각이다.


주인공은 제지 공장에 다니는 블루 컬러 노동자다. 남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그는 갑자기 직장에서 짤린다. 이 영화는 해고 통보를 받은 한 가장이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이야기다. 그는 재취업을 해보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취업 시장에서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한다. 직장을 잃은 중년 남성은 어떻게 대담한 살인자로 변모하는가?


이미지 출처: 네이버


주인공은 노동이 무가치해진 세상에서 회사를 향해 분노하기보단 비난의 화살을 잠재적 경쟁자에게로 돌린다. 이렇게 복수의 대상이 흐릿해지는 이유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다. 당장 생존이 급하니 넓은 시야로 내가 처한 상황을 조망하기 힘들다. 회사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서 적으로 지목하기가 어렵다. 조직은 합법적인 시스템 하에서 그저 굴러갈 뿐이다. 결국 약자인 주인공은 절박해질수록 확실한 재취업을 위해 승부수를 던진다. 이 과정에서 원래 회사-개인 간 대립이었던 갈등 구조는 개인 간 경쟁 구도로 바뀐다.


자본을 움직이는 주체, 회사는 오늘날 거대한 권력이다. 이 집단에 속하려고 다들 열심히 노력한다. 이제 정규 교육의 목표는 더 좋은 직업을 갖고 부를 거머쥐는 것이다. 아등바등 애써서 입사하면 회사는 직원이 소속감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나는 이 조직의 일원이라는 자긍심, 성과 창출, 자기 개발. 조직에선 이런 가치를 강조하지만 정작 피고용자 입장에선 좋은 고과를 받아도 마음은 무겁다. 이 수준을 유지하다간 금세 번 아웃(burn-out)이 올 판이다.


더 노력하면 높은 직급으로 상승할 거라는 희망 고문은 노동자에겐 강력한 마취제다. 하지만 모두가 결국 퇴물이 된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회사와 개인은 결국 합당한 선에서 주고받는 거래적(transactional) 관계라는 걸 늙어서야 깨닫는다.


주인공도 이런 식으로 현타를 당한다. 그는 제조업이 부국을 위한 기간산업이었을 때 한평생을 조직에 몸 바쳤다. ”회사가 또 하나의 가족“이란 문구가 유행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기계와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니 그는 쓸모없는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직원에게서 단물을 다 빨아먹은 회사가 과연 잘못한 건가?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생산 효율화라는 명목 하에 기업을 유지하려면 이 방법 밖엔 대안이 없다. 그렇다면 그저 열심히 살아온 주인공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미지 출처: 네이버


쓸모없어진 노동자에겐 복수의 대상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자본주의 사회의 맹점이다. 적자생존 사회에서 구직자는 스스로를 능력 부족으로 탓하기 쉽다. 피라미드형 경쟁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한다. 내쳐진 자는 끊임없이 반성하고 모자란 부분을 채우려 한다. 슈퍼맨, 슈퍼 우먼은 이상적인 자아상이다. 완벽, 최고를 추구하다 보니 우울증불안 장애는 현대인의 계절 증후군이 되어 버렸다. 뜻대로 되는 게 없을 때 느끼는 무능감은 자연히 우울의 씨앗이 된다.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해 너무나 쉽게 뒤쳐지는 느낌은 불안의 원천이다.


결국 주인공은 3명의 경쟁자를 살인한다. 첫 번째 살인은 어설펐다. 하지만 점점 원숙해진다. 사체를 처리하는 솜씨도 진화한다. 첫 경쟁자를 살해할 때 주인공이 경쟁자에게 내뿜는 절규는 사실 자신을 향한 진심이다. 그는 살인 전 라이벌에게 외친다. 제발 당신 아내 말 좀 들으라고. 이 얘기는 사실 주인공이 자신에게 건네는 잔소리였다. 아내만도 못한 찌질한 남편으로 사는 경쟁자는 사실상 주인공의 본모습이었다. 두 번째 인물은 자식을 향한 아비의 사랑을, 세 번째는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주인공의 공포와 폭력성, 인정욕을 공유한다. 나이도 처지도 비슷한 동년배 구직자들에게 이처럼 다양한 연민을 느끼지만 주인공은 이들을 기어코 제거해 버린다. 스스로 인간답기를 포기한 순간이다.


살인이 익숙해질수록 주인공은 점점 찌질해지고 속물근성을 드러낸다. 아내의 속옷 냄새를 검사하는 편집증적 망상은 가정에서도 내쳐질 것 같은 두려움이 극대화된 모습이다. 물건을 훔친 아들에겐 거짓말을 가르치는 남편(주인공)이나 자식이 경찰 조사를 안 받게끔 19금식 도발을 하는 아내의 모습이나 도찐개찐이다. 부부가 서로를 향한 진심이랍씨고 당신 잘 생겼다고, 예쁘다고 추켜 세우는 장면도 지켜보면 쓰디쓴 웃음이 나온다. 부부가 맺어진 인연은 이리도 피상적일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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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경쟁자를 제거하며 주인공은 드디어 재취업에 성공한다. 노동자로서 좀 더 생명 연장에 성공했지만 또다시 내쳐지면 그땐 무슨 짓을 할까? 그는 이미 살인자가 되었다. 겉으론 성실한 가장이지만 앞길을 방해하는 그 누구라도 죽이는데 이미 익숙해졌다.


이런 인물에게 관객은 감정 이입하기가 힘들다. 다른 영화들처럼 주인공을 공감하며 줄거리를 따라가는 게 어렵다. 아마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주인공과 첫 번째 경쟁자가 자신의 흥미를 직업으로 이어가려 애썼다면 이들 미래는 어땠을까? 주인공은 아내에게 ‘식물인간’이란 별명을 들을 정도로 분재 가꾸기를 좋아한다. 첫 경쟁자도 카페 창업을 고려해도 될 만큼 LP 음반과 끝내주는 청음 장비를 구비해 놓았다. 이런 취향은 제2의 창업 기회로서 한 번쯤 고려해 볼 만한 대안이다. 하지만 매달 따박따박 월급 노예로 사는 게 익숙해지면 홀로 돈벌이를 시도해 보려는 용기를 내기란 힘들다.


어쩔수가없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세 번째 살인을 저지르기 직전, 주인공은 되뇐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속삭임. 이 강렬한 살인 유혹은 비록 비현실적이지만 경쟁에 내몰리면 누구라도 자극받기 쉬운 충동이다. 당신도, 나도 이젠 좀 더 빨리 이 노동 시장에서 쓸모없어질 거예요. 그땐 어떡할 건가요? 영화가 건네는 이 질문에 현답은 찾기 힘들다. 그저 답답해질 뿐.


자 이제 클라이맥스. 마지막 살인 전 주인공은 중요한 금기를 깨뜨린다. 무려 9년이나 참아온 금주령을 해제해 버린 것이다. 이 순간 그는 인간이라기보단 짐승이었다. 상한 이빨을 뻰치로 뽑아버리며 드디어 현실이 주는 통증에서 해방되려는 몸부림. 이건 직장인이 스트레스를 술담배로 해소하는 모습과 다를 게 없다. 내 몸과 영혼을 스스로 해치는 행위이기에 주인공의 행동은 일종의 자해다. 실직자의 고통은 이리도 쓰라린데 이따위 발치 통증쯤이야.


자기 착취가 일상화된 시대에 약자는 분노할 대상마저 잃어버렸다. 일하고 또 일해도 변화에 대비하긴 어렵다. 나에 대한 자책은 계속된다. 내 자리를 차지하려는 또래들은 눈엣가시가 될 뿐. 자본이 지배하는 거대한 수익 구조 아래 대다수 약자들끼리는 아귀다툼을 멈출 수 없을 뿐.





덧. 〈어쩔수가없다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작 소설 《액스(The Axe, 1997)》를 바탕으로 했지만 일정 부분을 각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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