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고기(People and Meat, 2025)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밥상을 마주한다는 건 의외로 어렵다. 값싼 채소, 김치 말고 신선한 고기를 곁들이자면 돈이 든다. 고깃집에선 혼밥도 힘들다. 함께 할 지인이 필요하다. 시간도 돈도 사람도 필요한 행위, 식사가 박탈된 노년은 과연 어떤 삶일까?
사람이 나오고 고기 먹방이 나오겠지 싶었는데 딱 맞다. 다만 이 제목은 소재만 흘깃 비출 뿐. 막상 보면 작품에 담긴 주제의 깊이에 놀랄지도 모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작)》이란 문구가 저절로 떠오를 지도.
살면서 예전엔 중요했던 것들이 점점 부질없어지면 그땐 무엇이 남을까. 사랑도 명예도 가족도 다 떠나가 버리는 나이가 되면 말이다. 돈? 건강? 인간다움을 유지하려면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아직 이 세상에서 내가 인간이라는 걸 확인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자 다르리라. 하지만 세 노인의 일상을 지켜보니 사람답게 살기 위한 보편적인 답 한 개 정도는 추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바로 누군가와의 접촉이리라. 피상적인 안부 인사라도 사라진다면, 언어를 잃어버릴 만큼 입 땔 일이 없어진다면, 이 세상에서 투명 인간이 된다면 강제로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관계란 마치 공기를 들이마시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경험이다. 하지만 어느 나이 대가 지나면 직장 동료도, 가족도, 친구도 내 곁을 떠난다. 노인이 된다는 건 이렇게 날 바라봐주는 누군가를 상실한다는 뜻이다. 거울이 되어주는 누군가가 없어진다는 건 예전에 존중받았던 내 정체성 일부, 혹은 전체를 잃어버리는 충격이다.
그렇게 노인이 된 세 사람. 예전의 계급장 다 떼고 고관절이 삐걱거리는 나이가 되니 이젠 거리에서 어떻게든 매일 끼니를 해결할 만한 밥벌이가 중요해졌다. 젊었을 땐 나름 살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각자 있었을 진 몰라도, 지금 이 셋은 다시 아이가 되었다. 서로가 바라봐 주니 또래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대책이라곤 없는 인생 마지막 일탈을 감행한다. 이 과정은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공을 곁에 두며 ‘프라이데이(Friday)’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말을 거는 것처럼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셋은 어쩌다 무전취식을 했을까. 두 남정네는 왜 폐지 수집 중 아귀다툼을 벌였을까. 셋은 왜 법정에서 초연했을까. 사연을 따라가자면 노인 빈곤, 자살 등 묵직한 주제가 풍긴다. 하지만 보기에 부담스럽진 않다.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도 있고 저절로 피식 웃게 된다. 굳이 말하면 스릴러 혹은 블랙 코미디라고 해야 할까.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식상한 표현이지만 온전히 사람답게 산다는 건 참으로 어렵다는 걸 실감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저)》에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지만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당차게 춤을 추는 조르바처럼, 나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모조리 즐기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한 기억이 난다. 소설을 읽으며 대책 없던 자신감이 끓어올라 마음 속에 품었던 감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바램은 한 해 한 해 살면서 사치스러운 꿈이란 걸 알겠다. 조르바처럼 마지막 찰나까지 존엄을 유지한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이가 쌓일수록 인생은 전쟁이란 걸,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입증하는 게 너무나 어려워진다는 걸, 생존용 사료가 아닌 제대로 된 밥 먹기가 이젠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는다. 노년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애도하고 위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