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식 블랙코미디, 당신도 나도 거짓말이 더 편하잖아

무대공포증(Stage Fright, 1950)

by 녹색광선


우리는 자주 거짓말을 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적게는 하루 1.5회, 많게는 하루 200회까지 측정치는 차이가 있다. 심지어 언어학자들은 인간이 거짓말을 하면서 언어가 발달했다고 말할 정도다. 우리는 약간씩 거짓을 섞어 진실을 가려 말하는데 익숙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에 들기 전까지 우리가 자주 하는 허언들은 다양하다. 와 반갑다! 언제 한 번 밥 먹자. 넌 내 친구잖아. 네 좋은 말씀입니다.


이런 립 서비스(lip service)를 하는 건 넓게 보면 생존 본능이다. 서로 직설화법만 써가며 갈등을 마주하다가는 난 매일 싸움닭이 될지도 모른다. 그저 적당히 피하는 게 상책이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에게 "당신은 참 무식하군요."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왓 위민 원트(2000)❭에서 겉과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버려 골치가 아픈 바람둥이(멜 깁슨 역)처럼, ❬정직한 후보(2020)❭에서 뻥쟁이였다가 갑자기 정직한 정치인으로 돌변한 후보(라미란 역)처럼, 너무 정직해지면 오히려 사회생활이 불리해진다. 그렇다고 ❬유주얼 서스펙트(1996)❭에 나오는 범죄 용의자처럼 주변 물건들을 보며 즉석으로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위기를 모면하는 게 습관이 되면 이것도 곤란하다. 이렇게 밥 먹듯 거짓말을 하면 사람에게 믿음을 잃기 십상이다.


한 마디로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가려서 해야 한다. 조금 어려운 말로 풀어보면 거짓말을 잘하는 이들은 사회적 눈치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 간에 오고 가는 무언(無言)의 분위기를 잘 알아차려야 유리하다.


이 영화에서 히치콕은 "우리 모두 거짓말을 밥 먹듯 하잖아."라는 사실을 냉소적인 풍자와 유머를 곁들인 블랙코미디로 보여준다. 등장인물 중 거짓말을 안 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 게다가 거의 모든 대사가 거짓말이다. 작은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키우는 법. 가족끼리, 연인끼리, 직업윤리를 지켜야 하는 하녀도, 스쳐 지나가는 조연들도,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경찰마저도 모두 거짓말을 해댄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면 알게 된다. 이게 사실 우리의 일상이라는 걸. 민낯이 까발려지는 순간, 진실이란 무대에 대한 공포증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걸.



(이제부터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외모와 연기력으로 동정 얻기


이미지 출처: IMDb.com


하필이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직업 배우다. 연기자란 잠시 실제가 아닌 가짜 자기(pseudo-self)로 살 수 있는 대표 직업 아닌가.


이야기는 어떤 뷸륜 남녀로부터 시작한다. 샤를롯과 조나단. 두 사람은 같은 일을 하며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 이 남녀는 능수능란한 연기가 특기다. 불륜을 감추려고 이 재능을 써먹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그런데 갑자기 샤를롯 남편이 살해되었다.


조나단은 연인이자 유명 배우 샤를롯의 어떤 부탁을 들어주려다 오히려 살인자로 몰려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다급해지자 그는 자신의 매력을 이용한다. 평소 내 주변을 맴돌았던 여자 사람 친구, 이브를 도피처로 삼은 거다. 그는 이브가 배우 수업을 받는 장소에 갑자기 나타나 임기응변식 연기력을 발휘해서 경찰을 보기 좋게 따돌린다.


그뿐인가. 그는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이브 앞에서도 어장관리용 연기를 이어간다. 피해자 코스프레 하듯 도망자가 된 신세를 호소하니 여자에게 동정을 얻어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2. 오지랖 떨며 존재감 느끼기


이미지 출처: IMDb.com


이브는 호감남 조나단을 오지랖 넘치게 도와주려 한다. 여자로서 그에게 다가갈 만한 절호의 기회 아니겠는가. 그녀는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과 범위를 스스로 과대포장한다. 그가 필요로 하는 건 내가 다 해줄 수 있다고 대책 없이 과신하는 거다.


'난 좋은 일을 하는 거야,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식 자기 암시는 중요한 일을 할 때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큰 힘을 준다. 일종의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처럼 전능감을 주는 거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적 바람을 구분 못한 채 이런 상상에만 빠져들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항상 중요한 인물(grandiose-self)라고 착각하기 쉽다. 이런 거짓 존재감은 우리에게 만족과 불안을 동시에 안겨준다.


이브는 비록 무명이지만 그녀도 배우다. 이제 그녀는 거짓말을 정당화하며 팔색조 연기력을 발휘한다.




#3. 관종녀로 위험 무릅쓰기


이미지 출처: IMDb.com


이브는 또 얼마나 줏대 없이 관심에 배고픈 여자인지. 그녀는 호감남 조나단을 철석같이 믿고 그가 살인자라는 누명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 애쓴다. 이런 오지랖 넓은 도움 주기에 대해 이브의 아버지는 딸에게 핀잔 섞인 충고를 한다. 위험한 짓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브는 살 떨리는 연기력을 갖춘 무명 배우였다.


그녀는 조나단의 내연녀인 스타 배우 샤를롯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그녀의 실제 하녀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이 대타로 취직을 해버린 것이다. 원래 하녀에겐 자신이 샤를롯 남편 살해 사건 취재 중인 기자라고 속였다. 이브는 이렇게 하면 조나단의 누명을 벗길 만한 알짜 정보를 샤를롯에게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브는 위험할 정도로 아찔하게 오지랖 넓은 관종녀이다.




#4. 허풍 떨며 능력 부풀리기


이미지 출처: IMDb.com


그런데 샤를롯 하녀도 참 입이 싼 인간이다. 그녀는 술집에서 경찰에서 진술한 바를 크게 떠들어댄다. 이 하녀는 사람 없는 집에 조나단이 있는 걸 발견한 게 자신이라고 떠벌려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중요한 목격자 역할을 했음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며 이브는 하녀가 속이기 쉬운 여자로 보였다.


결국 이브는 이 하녀를 칭송해 주며 구워삶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관심과 주목을 즐기는 인간은 자신에게 이득 되는 건 마다하지 않으리라. 이브가 샤를롯 하녀에게 기자 연기를 한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5. 하얀 거짓말로 검은 거짓말 키우기


이미지 출처: IMDb.com


그런데 하얀 거짓말은 점점 커지며 의도치 않게 검은 거짓말을 낳기도 한다. 관종녀 이브는 술집에서 어떤 호감남을 마주친다. 우연찮게 발견한 형사 스미스. 그녀는 자신을 여자로 친절하게 대해주는 이에겐 일단 마음이 약해지나 보다. 시간이 지나며 이브는 서서히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조나단을 아직 좋아하는 걸까, 스미스에게 마음이 옮겨간 걸까.


스미스 형사는 공교롭게도 샤를롯 남편 살해 사건을 담당한다. 이로 인해 점점 이브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이젠 자신이 샤를롯 하녀로서 경찰 면담도 해야 하고, 어떨 땐 스미스 앞에 호감녀로도 나타나야 한다. 이브의 1인 2역 연기가 펼쳐지면서 줄거리는 점점 복잡해진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범죄자를 돕는 조력자로 변해 있었다. 조나단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록 죄책감은 늘어만 가고, 새로운 호감남 스미스에 대한 감정은 깊어지니 이브의 고민은 커져만 간다.




#6. 주변을 착취하는 인맥 설계


이미지 출처: IMDb.com


샤를롯은 사실 남편 살해 사건을 꾸민 설계자였다. 그녀는 교묘한 언변으로 내연남 조나단이 용의자로 주목받도록 사람들을 조종한다. 경찰에게도 남편 사망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진술을 하고, 그녀의 집 하녀가 의심쩍은 상황에서 일부러 조나단을 목격하게끔 만든다. 그녀는 스타 배우인 만큼 출중한 연기력으로 남편을 잃은 비극적인 미망인 행세를 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샤를롯은 음흉한 속내가 드러나는 진실의 무대에 올라서야만 했다. 이브는 자신의 거짓말을 더 큰 거짓말로 봉인하는 데 지쳐서 이 모든 헛발질을 끝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브는 잠시나마 호감남 조나단에게 구애했던 자신을 반성한다. 또한 스타 샤를롯이 착취자로 등장하도록 진실의 무대를 기획해 냈다.


게다가 착취자 샤를롯의 내연남이었던 조나단은 또 어떠한가. 그는 결국 이브를 착취했고 경찰에 쫓겨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자 자신에게 호감을 베풀었던 이브에게조차 사이코패스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 반전은 영화로 확인해 보길.




우린 모두 거짓말 용의자다


이미지 출처: IMDb.com


거짓말은 섬세한 화법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해야 할지를 미리 생각해야 한다. 또한 내가 한 거짓말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미리 떠올리는 상상력도 필요하다. 거짓말을 제대로 하려면 복잡한 사고와 감정적인 섬세함이 필요하다. 또한 위 모든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거짓말이란 내가 어떤 이득을 얻고자 할 때 보편적으로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거짓말을 하는 심리적 기제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거짓말을 하기에, 특정한 거짓말쟁이만을 가려내는 원리를 밝히는 건 어렵다.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생리적 변화를 이용한 거짓말 탐지기 같은 도구도 존재하지만 역시나 완벽하게 거짓말을 감별해내진 못한다. 하지만 이런 도구는 범죄자에게 위압감을 주는 효과가 있기에 계속 쓰이고 있다.


말하기엔 껄끄럽지만 우린 사실 모두 거짓말쟁이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범죄자가 되지 않는 선에서 우린 모두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넘나들며 민낯을 가리려는 거짓말 용의자이다.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7.09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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