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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May 24. 2023

초야(草野)에서 쉬다.

문재인입니다 (This is the president, 202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초반부터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줄 알았다. 이름 모를 꽃과 식물들이 연이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 곁에서 열심히 마당을 가꾸는 노부부와 참모들. 그중에서도 흰 수염과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얼굴에 번진 농사꾼이 한때 대통령이었던 사람이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그의 벗, 노무현이란 사람은 철학자로 치면 니체처럼 보였다.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고 외쳤던, 신이 지배한 세계관을 깨부수며 기어이 광인으로 불리길 주저하지 않았던 개척자처럼, 노무현은 기성 정치가 군림하는 생태계를 뒤집으려 등장한 돌연변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곁엔 말수 적은 친구 문재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유명한 "깜이 됩니다 연설을 보면서 말이다.


2002년 부산 선거대책본부 출범식 연설


나는 대통령 감이 됩니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2009년 5월, 그가 서거했을 때 노란 물결이 가득했던 광화문과 남대문 사이 도로를, 내 발등을 뒤덮은 노란 유인물들을 보며, 인파 속을 걸으며 생각했다. 


사람을 뽑으면
지켜줘야 하는구나.


쨍한 태양 아래에서 후회했다. 거대한 인파가 뜨거운 아스팔트 위 노제 행렬을 메꾼 걸 보며 더더욱 부끄러웠다. 정치란게 뭔지 잘 몰랐던 맹탕 중도층인데도 울분이 터졌다. 분명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다. 왜 깨달음은 뒤늦게야 오는 걸까. '그가 세상에서 꿈꾸었던 어떤 변화도 거저 오는 게 아니구나. 뭔가를 제대로 바꾸려면 아주 오랫동안 내가 신뢰하는 정치인을 지지하고 지켜내야 하는구나.'


다시 수년의 세월이 흐르고 촛불혁명을 거치며 문재인은 이 나라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안은 자리, 대통령직에 앉는다.


그가 동식물에 관심이 이토록 많은 사람이었는지 몰랐다. 안부를 확인할 만한 근황 중 뉴스 헤드라인을 이미 장식한 소식 외엔 반려견과 반려묘, 집 주변 마당을 채운 채소와 식물을 돌보는 일상이 주 내용이다.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은,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그가 이토록 경외하는 자연에 비유하자면 문재인은 마치 물처럼 보인다. 거쳐가는 무엇이라도  모양새에 맞게 맞추며 유연하게 섞이고, 자신과 섞인 어떤 대상도 고유의 빛깔이 덮이지 않게끔 투명하게 감싸는 무색(無色)이며, 조금 흐를 때면 소리가 없지만 오랜 세월 흐르고  흐르면 웅장한 물줄기가 되어 굉음을 내며 모난 돌도 깨부수는 거대한 힘을 가진 물처럼, 때론  건조하고 척박한 세상에서 목마른 대중에게 촉촉한 빗방울로, 대지를 채울 만한 냇물로, 주류(主流) 바꿀만한 거대한 강물과 바다로 다가올  있는 사람,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거대한 사람.


영화 만듦새를 논하고 싶진 않다. 사실 상영 시간이 좀 길다. 특히 퇴임 후 뉴스 기사거리가 되었던 화제들은 돈과 시간을 쓰는 관객이라면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다. 또 보다 보면 혈압이 오르고 상영관을 나서며 술 생각이 저절로 나는 그런 내용이기에 좀 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뉴스 화면이 나올 때 OST 또한 과했다고 본다. 다큐 영화 특성상 극적인 요소가 없기에 감정을 고조시키려는 목적으로 음악이 삽입된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의도가 지나치게 보였다. 물론 이런 게 전혀 문제가 안 될 만큼 남자 주인공 문재인을 보고 또 보아도 또 보고 싶은 사람들이 관객 대부분이겠지만.


퇴임 후엔 잊히고 싶다는 바람과는 다르게 이런 영화가 나온다는 게, 내가 본 늦은 저녁 회차에도 꽤 많은 관객들이 자리를 채웠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일개 관객으로선 반가운 마음이었지만 말이다. 이젠 영화 주인공이 된 이 인물이 덥수룩한 수염으로 마음껏 멋 내기를 해보며, 과거 <오르막길> 책에 나온 여정만큼 힘든 히말라야 등산은 못하겠지만 마음껏 자연을 즐기며 여생을 보내시길 바라본다.


덧. 이 영화의 영문 제목(This is the president)이 어쩌면 관객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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