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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걸작: 귀여움의 해석은 무죄

아이의 창작물에 대한 진지한 해석

by Leading Lady


아이들을 보면 창작은 인간의 본능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존재들은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도 놀이를 통해 기꺼이 창작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평면 회화는 물론이고 조소, 조각, 공예, 꼴라쥬, 페이퍼아트, 건축, 공공미술(벽화..), 장식미술(가구에 색칠..) 등등.. 수천 년에 걸친 예술의 역사 속에서 독립된 영역으로 발전되어 온 장르의 방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며 하루에도 몇 개씩 멋진 것들을 쏟아내죠.


천장까지 쌓아올리는 이건 고딕 양식의 건축?
하루에도 수백개를 만들고 허무는 색모래 조소(좌), 물티슈 천연 염색해서 만드는 스카프는 어엿한 섬유공예(우)



일상의 전구: 버려질 운명 속 빛나는 순간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생산되는 이 사소한 창조물들이 모두 특별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버려질 운명에 더 가깝습니다. 그것들은 집 안에 쌓이고 밟힐 정도로 흔해져, 우리는 간직하는 방법보다 버리는 방법을 더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이 창조물 가운데에서 미적 체험의 순간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된 아이의 예술이 너무 특별하고 소중하여 '어떻게 하면 잘 버릴 수 있을까' 하는 모순된 생각마저 드는 바로 그 순간들 말입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어빙 라빈(Irving Lavin, 1927-1919)은 이러한 순간을 '전구효과(light-bulb effect)'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술작품에 대해 의미있는 관찰이 이루어질 때 그 사람의 내면에서는 밝은 빛이 딸깍 켜진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 희열의 순간을 맛보았지만, 작품의 거의 유일한 관객으로서 "와 귀여워~! 정말 잘했어!"라고 반응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아이가 생산해내는 다양한 결과물만큼이나 제 전구가 켜진 맥락 또한 수없이 다채로운데, 그저 귀여움으로 해석되고 쉽게 잊히는 것에 저는 어떤 심한 갈증과 허기를 느꼈습니다. '방금 이건 이렇게 버려질 순간이 아닌데...'


작은 과자곽을 색종이로 싸서 털실로 감는 무제의 오브제(좌), 종이를 한창 찢던 시절 풀을 줬더니 탄생한 페이퍼 꼴라주(우). 그 진지함을 알기에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아이가 귀엽다고 작품도 귀여운 건 아니니까요.

아이의 창작물에 대한 해석이 '귀엽다'는 표현으로만 단순화되는 것은 일종의 축소이자 오해일 수 있습니다. 귀엽다는 평가는 작품 자체의 가치보다 '창작자가 아이'라는 맥락에 더 초점을 맞추며, 작품 고유의 표현과 메시지를 간과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이의 창작물이 성인의 관점에서 미성숙하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작품이 갖는 고유한 표현과 메시지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맥락, 이를테면 우리가 미술관에서 동일한 작품을 보았다면 진지한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아이를 기특하게 느끼는 시선 때문에 ‘귀엽다’, ‘대단하다’ 등의 무조건적 긍정 언어로 표현하게 되는 것은 작품 해석 차원에서는 일종의 역차별이기도 합니다.


"아이의 그림이나 만들기가 깊은 철학적 해석이 필요할 만큼 진지한 예술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예술이라 인지하는 예술이란 절대적 진리가 아닌 개념의 산물입니다.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는 이전에 예술로 여겨지지 않던 것들이 전시장 좌대에 올라가 있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이의 창조물이 예술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은 그것을 예술로 인정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갤러리, 평론가, 출판물, 미술관과 같은 여러 예술 제도 속에서 그 가치가 증폭되는 법입니다.


원시 종교적 물건들을 '비너스'라 명명하고 예술이라는 개념을 부여한 건 근대이다. 뒤샹의 '샘' 또한 내적 가치보다는 예술 논의와 제도 안에서 미술로 간주된다.



소통으로서의 예술: 아이의 창작물 해석의 의미

제가 아이의 작품을 진지하게 해석하려는 것은 아이의 재능을 과시하거나 아이에게 예술가의 지위를 부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만 가장 가까운 관객으로서, 창작자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이의 작품에 담긴 의미와 표현 방식을 보편적 언어로 풀어내는 것은 제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어빙 라빈이 말했듯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소통의 한 형태입니다. 즉, 예술가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며, 그 내용과 표현 방식 사이의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그림이나 만들기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려 했다면, 그 아이가 무엇을 말하려 했고 왜 이런 방식으로 표현했는지에 대한 논리적 해석은 의미 있는 소통이 될 것입니다.


저의 사소한 일상에서 전구가 켜졌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몽글몽글합니다. 저는 일상에서 특별하게 다가왔던 어린이의 창작물에 대한 아름다움과 의미를 인정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사 및 미학적 담론들과 어떤 연결 지점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싶습니다. 이 글이 단순히 아이의 작품을 텍스트 형태로 기록하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 예술을 잘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미술사'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의 표현 욕구와 사회가 이루어 낸 역사의 발걸음을 쉽게 이해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내면의 전구'를 키는 작은 스위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참고문헌]

- Irving Lavin, 「Art of Art History」, 1996, Leonardo, Vol. 29, No. 1

-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1997, 현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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