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놀이가 만들어낸 미학적 순간
어느 평범한 오후, 돌쟁이 아이는 장난감 공을 홈에 넣는 놀이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나중에 장난감을 정리하던 중 무심코 발견한 아이의 놀이 흔적 앞에서 저는 걸음을 멈췄습니다. 빨간 공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사과 모형이 무심하게 놓여 있었죠. 색의 유사성을 유지한 채 형태만 슬쩍 변주된 그 사과는 항상 익숙했던 일상 속 장난감을 한순간에 낯설게 만들었습니다. 이 우연한 조합이 저에게는 마치 1917년 뒤샹의 '샘(Fountain)'을 마주했을 때 미술계가 받았을 충격만큼이나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레디메이드, 예술가에게 선택받은 사물.
대량생산된 변기에 제목을 붙이고 서명을 한 후 전시장에 놓은 뒤샹의 행위는 예술의 정의와 경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전까지는 작품 자체가 예술적 형식을 갖춘 것을 예술로 보았다면, 뒤샹은 예술계의 시스템으로 정의의 방식을 전환하고 확장한 것입니다. 어떤 사물이 예술작품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사물만을 관찰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뒤샹의 변기는 물리적으로 상점에 쌓인 수많은 변기들과 다를 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이 다른 변기와 구별되어지는 원리는 한 사람이 미혼인가 기혼인가를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제도적인 것이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람을 신부로 인식하는 것 만큼이나 개념적인 것입니다.
레디메이드(readymade)의 개념은 이 지점에서 등장합니다. 뒤샹은 '예술가의 선택이 예술을 만든다'는 혁명적 명제를 제시했는데, 이는 예술가가 '선택'한 기성품(readymade)과 선택하지 않은 것의 차이가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술가가 기술자나 장인(artisan)처럼 손수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이라는 당연한 관념에 대한 종료 선언이었습니다. 미술의 본질에 대한 뒤샹의 공격을 계기로 예술가에게 중요한 재능은 손재주가 아니라 창의적인 발상과 아이디어라고 여겨지게 되었고 이후 미술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죠.
낯설어서 좋아! 유쾌한 인지적 충돌.
레디메이드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핵심은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의 미학에 있습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빅토르 슈클로프스키가 말한 '오스트라네니(ostranenie)'—일상에 대한 자동화된 인식을 타파하고 사물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인식하게 만드는 예술적 전략-이 없었다면, 뒤샹의 '샘'이 미술계에 충격은 주었을지언정 오래도록 대중의 공감을 받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화장실에 있어야 할 변기가 전시장에 놓인 것 자체가 관객을 낯설게 하고, 다음으로는 두 사물 사이의 형태적 유사성 및 액체가 모이는 속성의 연관성을 따서 지은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이 관객을 웃게 합니다. 유쾌한 인지적 충돌을 마주한 사람들은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던 고정관념이 비틀리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발상을 한 예술가는 과연 어떤 사람일지‘를 궁금해하게 되죠.
이것이 예술일까?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뒤샹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장난감이라는 일상 오브제를 자신만의 논리로 재배치한 것, 빨간 공 대신 비슷한 색상의 사과를 선택한 아이의 행위는 단순한 대체나 실수가 아닌 형태와 개념의 전이를 보여주는 미학적 결정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순수한 유희와 위트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공이 아니라 사과다'라고 선언하는 듯한 아이의 행위는 르네 마그리트의 명작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를 연상시키는 개념적 트릭이자 시각적 말장난으로 연결됩니다. 공의 자리에 엉덩이를 집어넣고 태연히 공인 척을 하는 사과의 모습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듯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빨간 사과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것이 예술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마치 1917년 뒤샹의 변기처럼 말이죠.
벨기에 예술가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는 레디메이드는 유머에서 시작하여 시로 끝난다고 말했다. 아이의 행위에는 사물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유쾌한 전복이 있었고, 그 전복은 그것을 관람한 유일한 관객인 제게 일상의 시적 순간을 창조했습니다. 기능적으로는 '맞지 않는' 사과를 빨간 공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아이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범주와 질서에 작은 균열을 냈습니다. 이 균열을 통해 저는 일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전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이의 놀이 흔적이 하찮지 않았습니다. '혹시 또 나만이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 숨어 있진 않을까..' 하며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거든요.
빨간 사과가 열어준 일상과 예술의 교차점
존 듀이는 1934년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예술이 전시장이나 공연장 등 특정 시공간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말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작품과 인간의 일상 사이의 끊어진 연속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예술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임무라고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전시장에 놓였기 때문에 예술'이라는 뒤샹의 철학보다도 예술의 범위를 더우 확장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시장에 놓이지 않아도 예술'이라는 뜻이었거든요. 미적 체험이 제도화되고 장르화된 예술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그의 이론은 일상과 예술의 거리를 좁혔죠. 이후 뉴욕의 링컨센터에듀케이션(Lincoln Center Education)은 존 듀이의 철학을 이론적 토대로 하여 미적 체험 기반의 예술교육 체계를 만들었으며, 기존에 예술 이론의 일방향적 습득 및 기량 개발이 주를 이루던 예술교육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빨간 사과를 바라보는 순간, 저는 존 듀이가 말한 강렬한 미적 체험의 파동을 느꼈습니다. 방 안을 굴러다니던 평범한 오브제가 미학적 사유의 대상이 된 순간, 그 방은 전시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예술이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에 존재할 때 의미를 가진다는 듀이의 통찰은 일상에서 만난 레디메이드 앞에서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12개월 아이의 순수한 놀이가 만들어낸 이 미학적 순간은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고 느끼는 감동과 정확히 같았고, 가장 개인적인 일상에서 발견했기에 더욱 깊은 의미로 남았습니다. 그날 이후, 아이의 놀이 흔적은 제게 정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혹시 또 익살스러운 무언가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게 만드는 작은 갤러리가 되었습니다.
[참고문헌]
박이문(2017), <예술철학>, 미다스북스.
메리 앤 스타니프제프스키(1997),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
The Guardian(2022. 6. 15.) <Duchamp’s Fountain was not the work of Baroness Elsa von Freytag-Loringhoven>, Dawn Adès (표지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