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예술의 ‘아웃풋’
요즘 아이들이 태어나 가장 먼저 접하는 사교육은 대개 예술교육입니다. 문화센터의 수많은 영유아 강좌들을 들여다보면 예술이 분명 우리 아이의 감각을 깨우고 창의성을 높여줄 것 같습니다. 매일의 고된 육아에 지치고, 내 아이가 뒤처질세라 조급한 부모의 마음은 그 앞에서 쉽게 무장 해제됩니다. 저 또한 아이 6개월에 인근 문화센터에서 오감놀이와 미술 프로그램을 등록했습니다.
6개월 아이가 미술놀이 한 번 한다고 무슨 변화가 보이겠습니까. 그냥 몸에 좋다니 비타민 먹는 기분이죠. 다만 재료를 손에 묻히고 주무르는 과정을 온전히 즐기는 아이의 순수한 모습은 그 자체로 충만한 예술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가 소위 말하는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여전히 미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으니까요. 아이의 취미를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동네 미술학원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같은 학교 아이들이 많이 다니고 있는데다 홈페이지에 아이들이 받은 미술대회 상장이 가득 올라오는 학원이었습니다. 다니는 학생들이 미술대회에서 수상한다는 사실은 아이의 예술적 재능 유무를 떠나,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싶었던 제 마음을 정확히 파고들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두어 번의 탐색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학원에서 내내 미술대회 출품을 위한 그림만 그렸습니다. 한 달에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미술대회들이 열리고 있었고, 학원은 그 정보를 꿰뚫고 아이들에게 맞춤형으로 대회를 추천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환경 보호’, ‘우리 가족‘ 등 대회들의 주제는 계절이나 사회적 이슈에 따라 유사했고, 설령 주제가 다르더라도 심사위원의 눈에 들기 위한 그림의 공식은 존재했습니다. 아이는 처음에는 대회라는 새로운 목표에 흥미를 보였지만, 이내 반복되는 패턴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쉽게 그만두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의 즐거움을 지켜주고 싶다‘는 저의 초심은 어느새 ‘성취를 통한 자존감 향상’이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변해 있었거든요.
그러던 중 아이는 정말로 꽤 이름있는 대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내심 이 순간을 기다렸던 저는 부끄럽지만 ‘드디어 학원을 보낸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상작은 국제 아트페어에 걸린다고 했고 1등은 무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서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수상을 했더라도 그것을 수상작 코너에 걸기 위해서는 추가로 적지 않은 돈을 내야 한다고 적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상을 받으면 상금을 받는 것이 상식적인데, 도리어 돈을 내야 한다니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출품비도 이미 따로 납부한 상태였는데도 말이죠. 그러나 주변의 학부모들을 보니 전시장에 아이 그림이 걸리는 경험을 위해 결국 추가금을 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이가 받은 상은 축하받을 성취만이 아니라, 새로운 판매로 이어지는 통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수상은 부모의 자부심과 기대를 자극하여 ‘전시’라는 또 다른 상품을 구매하게 만드는 장치였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트페어 개최지가 집과 멀기도 했고, 페어 기간에 장기 여행이 예정되어 있기도 해서 참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내심 기대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반짝이는 상장과 상패를 받고 나면 한껏 동기부여가 될 거라고요.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미술학원에 가기 싫어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제서야 대체 왜 미술을 배우는지에 대한 현타가 오더군요. 한때 그토록 좋아했던 그림 그리는 시간이 아이에게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에서 ‘과잉정당화 효과(Overjustification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 재미나 흥미를 느껴 자발적으로 하던 행동에 대해 상이나 돈과 같은 외적인 보상이 주어질 경우, 오히려 그 행동에 대한 내재적 동기가 감소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즉, 강력한 외부적 보상이 순수한 내부의 즐거움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의 소중한 창조 본능이 대회와 수상이라는 보상 장치로 과잉정당화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창작물들은 아웃풋이라는 이름으로 수단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이는 창작의 기쁨을 잃었습니다.
영어, 수학 등 여타 학원들이 그러하듯 미술학원 또한 전략적 창의성을 가르치고 로드맵을 제시해줄 수 있습니다. 점점 빨라지는 입시를 준비하고자 풍성한 수상 경력과 미술영재원 등을 노리는 아이들에게는 그 방식이 필요할 수 있고요. 수상 결과를 다시 신입생 모집을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또한 스마트하다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은 제 아이처럼 취미를 지속하려는 경우엔 딱 맞는 방법이 아니었던 것이죠. 결국 아이는 그 학원을 그만두고, 그리고 싶을 때 원하는 것을 그리는 자유로운 환경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은 예술 앞에서 아이의 마음이 생각보다 정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아이가 즐겁게 그리고자 하는 마음이 상을 받고자 하는 욕심보다 작을 것이라 과소평가했던 것에 깊이 반성합니다. 미술에 재능이 적으니 창작의 즐거움도 적을 것이고 외적 동기부여가 필요할 거라 함부로 가정했던 것이 후회가 됩니다. 결과물이 아닌 과정의 즐거움을 오롯이 느끼게 해주는 것은 예술만이 가진 장점인 걸요. 그 즐거움과 노력이 수상으로 이어져 아이가 진정한 성취감을 느낀다면 그건 너무 좋겠죠.
저는 아이가 8살에 그림대회에서 상 받지 않아도 좋으니, 본인의 긴 인생에서 예술의 가치를 알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씨앗을 많이 뿌려 놓길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아이 문화센터부터 방문미술, 미술학원에 비용을 지불하면서 기대하는 ‘아웃풋’임을, 앞으로는 잊지 않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