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향한 팬심으로 쓰는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여전히 내가 많이 부족한 교사라는 걸 느낀 한해였다.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이러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 한다’라며 아이들을 다그치는 일이 많았다. 나름대로 열의를 갖고 여러 가지 교육활동을 펼쳐 왔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건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선생님인데. 아이들을 좀 더 너그럽게 대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이런 선생님일지라도 매년 학년말이 되면 몹시 정성 들여 하는 일이 있다.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애정을 담아 자세히 써주는 것. 아이가 언제든 꺼내 읽어도 힘이 날 만큼 말이다. 아이 생활 모습과 칭찬을 틈틈이 기록해둔 파일을 옆에 두고 하루에 한 명씩 오직 그 아이만을 생각하며 쓴다. 나이스에 입력한 후에도 종합일람표를 몇 번씩 출력해 한줄 한줄 밑줄을 그어가며 퇴고를 한다. 아이의 고유한 특성을 잘 담아냈는지, 혹시나 내가 미처 적지 못한 아이의 장점은 없는지, 아이를 믿고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잘 전해지는지도.
나에게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이란 아이예찬이다. 나는 아이를 향한 팬심으로 쓴다. 내 교육관은 아이들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가진 좋은 점을 가능한 한 많이 발견하고, 그 장점들을 최대한 크게 봐주는 것이다. 교실에서 내가 바라본 아이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잠재력을 갖고 있기에 단정할 수 없는 존재이고, 나는 긍정적인 말의 힘을 믿고 있다. 내가 이런 교육관을 갖게 된 건 고2 때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크다.
2학년 학기 초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번호대로 담임선생님과 개인 상담 시간을 가졌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선생님 책상 위에는 우리반 학생의 반 등수, 전교 석차가 표시된 명렬표가 놓여있었다. 그 당시 내 학업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열심히 한다고 했으나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자신감도 없었다.
‘선생님은 상위권 애들에게만 관심이 있겠지.’
선생님 앞에 마주 앉으면서도 형식적인 상담이 될 거라 여겼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넌 참 똑똑하고 성실한 아이더라. 너 정도라면 00 대학교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야. 열심히 해봐.”
나는 어리둥절했다. 선생님이 언급하신 대학은 내가 가고 싶은 학교였으나 그때 내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선생님은 나를 점수로만 평가하지 않으셨다. 크게 드러나지 않던 나의 작은 장점을 눈여겨 봐주시고 할 수 있다고 말해주셨다. 그것도 아주 확신에 찬 어조와 눈빛으로.
나는 힘이 났다. 선생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공부를 했다. 어떻게든 친구들과 자리를 바꿔 항상 교실 앞자리에 앉았고, 수업 시간이 끝나면 나가시는 선생님을 쫓아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을 꼭 질문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시험을 칠 때마다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원하는 학교에 가게 되었고, 교사라는 꿈도 이룰 수 있었다. 내 꿈을 이루게 만든 건 선생님 덕분이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내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그날 야자시간 시집이 빼곡히 꽂혀있던 책상 앞에서 선생님이 내게 보여주셨던 믿음과 응원을 떠올린다.
작년 새 학기 첫날, 그 전년도에 가르쳤던 아이가 멀리서 나를 보고 반갑게 달려와 말했다.
“선생님이 써주신 말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엄마도 정말 감동적이라고 하셨어요. 두고두고 보실 거래요.”
나는 아이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넌 새 학년 가서도 정말 잘할 거야.”
나는 아직 품이 크지 못한 선생님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놀라운 가능성을 믿는다. 우리반 아이들의 꿈을 이루도록 돕고 싶다. 나의 선생님이 그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