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물가는 정말 비쌌다. 대부분 가격이 우리나라보다 두 배 이상이었지만 박물관과 미술관만큼은 예외였다. 영국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모던,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뮤지엄 등 유명한 미술관들이 모두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만 원이 넘는 입장료를 내야 하는 미술관을 찾는 것이 망설여졌던 것도 사실이다. 무료 미술관도 다 둘러보지 못할 텐데 돈을 내고 가는 것이 실속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국의 숨은 보석’이라는 코톨드 갤러리의 수식어는 너무 매력적이었기에 나는 그곳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코톨드 갤러리는 섬유 사업가이자 미술 애호가인 사무엘 코톨드가 수집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개인 미술관이다. 코벤트 가든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서머셋 하우스라는 복합문화공간이 나오는데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간판이 잘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기 쉽지만, 내부에는 고흐, 마네,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드가, 쇠라 등의 걸작들로 가득하다. 오르세 미술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상주의 컬렉션을 자랑한다.
미술관은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그 점이 더 좋았다. 작은 미술관 특유의 아늑한 분위기 덕분에 차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다. 대형 미술관에 가면 봐야 할 작품이 많아 좋기도 하지만 미로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전시실과 봐도 봐도 계속 나오는 작품에 압도될 때가 있다. 게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작품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진이 빠져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코톨드 갤러리는 유료라 그런지 관람객이 확실히 적어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코톨드 갤러리에서는 절로 발걸음이 더뎌졌다. 방금 모네 그림을 보고 몇 걸음 가면 마네 그림이 나오고 또 그 옆에는 고흐의 그림이 있다. 그리고 코너에는 드가의 조각상이 무심히 놓여 있다. 그저 황홀할 수밖에. 미술관에 있는 동안은 이 작품들이 모두 내 것인 양 마음껏 봤다.
전시실 곳곳에는 벤치가 놓여 있어 편하게 앉아 작품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마치 내 마음속에 작품을 하나씩 걸어두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많은 작품을 보기보다는 좋았던 작품을 오래 기억할 만큼 충분히 감상하는 것이었는데 코톨드 갤러리에서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갤러리에 훌륭한 작품이 아주 많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폴 세잔의 작품이었다. 그동안 세잔 하면 사과 정물화만 떠오를 뿐 그의 작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고흐의 자화상보다 세잔의 풍경화에 더 깊이 마음이 끌렸다. 갤러리에는 유독 세잔의 작품이 많았는데 실제로 본 그의 작품은 색채가 단연 돋보였다. 원초적이고 순수한 색채가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세잔은 색의 힘을 통해 그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전하고자 한 것 같았다.
그중 세잔의 <오스니의 연못>은 내게 시원하고 청명한 휴식을 주는 것만 같았다. 이 작품은 파리 북쪽 마을인 오스니의 숲속 연못 풍경을 그린 것으로 특히 작품 속의 초록색은 생기 가득하고 생명력이 넘쳐 무척 아름다웠다. 투명한 연못과 나무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빛줄기는 고요함과 희망을 안겨주어 계속 보고 있으니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쉼이 필요할 때마다 이 작품을 떠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톨드 갤러리에서 세잔이 준 감동을 이어가고 싶어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이 미술관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뮤지엄샵 때문이다. 미술관 관람의 하이라이트는 뮤지엄샵에서의 소소한 쇼핑이 아닐까 싶다. 코톨드 갤러리의 뮤지엄샵은 다른 어떤 뮤지엄샵보다 규모가 컸고 예쁘고 질 좋은 제품들이 많았다. 판매 상품을 활용해 각각의 공간도 세심하게 꾸며놓아 마치 근사한 카페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나는 여행지에서 에코백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 이곳에는 색깔, 크기별로 다양한 에코백이 있어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아이와 남편이 이제 그만 가자고 했지만 미술관을 떠나기 아쉬웠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생각하니 벌써부터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모네의 <안티베스> 그림이 표지로 있는 핑크색 코톨드 갤러리 도록을 집어 들었다. 특정 미술관의 도록을 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책이 있으면 언제든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위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