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국 여행에서는 빡빡한 일정 대신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아침에 납작 복숭아와 구운 식빵을 먹고, 호텔 침대에 누워 소설책 한 권을 펼쳤다. 여행 중 우리나라 문학이 그리워질까 봐 챙겨온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이었다. 햇살이 하얀 시트 위로 내리쬐는 가운데 첫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더 많은 음악'
프롬스 보는 날 이런 문장을 읽게 될 줄이야. 책에는 음악을 종교, 영혼 그 자체로 여기며 음악이 삶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다. 나 또한 그랬다. 누구의 위로도 와닿지 않을 때 말없이 소리로만 이루어진 클래식 음악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그 후 나는 사막에서 물을 찾듯 음악을 갈망했다. 내겐 늘 더 많은 음악이 필요했다.
이번 여름 영국에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BBC Proms’를 보기 위해서였다. 해외 클래식 음악 축제에 가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다. 영국에 머무는 열흘 동안 일요일 오전과 월요일 저녁, 두 개의 공연을 관람하기로 했다. 5월 말 BBC 홈페이지에서 예매를 하고 미리 출력한 실물 티켓을 책상 위에 올려두며 설레는 마음으로 여름을 기다렸다.
프롬스가 열리는 로열 앨버트홀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 웅장함에 압도되었다. 둥근 구조로 설계된 거대한 홀이 무척 매력적이었고, 아이는 이곳이 로마의 콜로세움 같다고 말했다. 놀라웠던 건 실내 음악회임에도 불구하고 팝콘, 아이스크림, 맥주, 와인 등 간단한 간식과 음료를 먹으며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클래식은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에서 관람하는 것이 정석이라 생각했는데 영화관처럼 캐주얼한 분위기가 신선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클래식이 친숙하고 일상이 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곳이 축제의 현장인 게 실감 나 마음이 들떴다.
프롬스는 프롬나드 콘서트(promenade concerts)의 줄임말로 산책을 하듯 음악을 즐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달 동안 매일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연주자가 출연하는 음악회가 열리는데, 특별한 건 로열석 자리에 의자를 치우고 스탠딩석을 만들어 이를 8파운드(한화 1만 5천원 정도)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물론 앉아서 볼 수 있는 좌석도 있으며 이 또한 일반 클래식 공연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 누구나 부담 없이 와서 음악을 즐기도록 하는 프롬스의 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프로머(스탠딩석에서 관람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아이를 업고 보는 사람, 난간에 기대어 보는 사람, 심지어 누워서 보는 사람 등 다양했다. 반면 공연 내내 별다른 미동 없이 꼿꼿이 서서 관람하는 사람들도 많아 음악에 대한 깊은 열정이 느껴졌다.
일요일 오전 공연은 판타지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협연자는 브라이마(바이올린)와 세쿠(첼로) 카네 메이슨 형제, 기타리스트 페르난데스였다. 이날은 가족 친화적 콘서트로 헝가리 무곡, 터키 행진곡, 리베르 탱고와 같은 대중적인 클래식 곡들이 연주되었고 전체적으로 활기차고 흥겨운 분위기였다. 드럼이 포함된 오케스트라 편성도 이색적이었고, 전광판의 조명이 곡의 분위기에 따라 바뀌어 공연의 몰입감을 더했다. 특히 세쿠의 연주는 강인하면서도 해방감을 주어 그의 독주를 제대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월요일 저녁에도 프롬스 공연을 보러 갔다. 이날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과 부소니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되었다. 영국의 피아니스트 벤자민 그로스뷔너가 협연을 했고, 에드워드 가드너의 지휘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다. 영국의 클래식 감성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와 영국 대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공연을 일부러 선택한 거였다.
이날도 아이는 레모네이드를 사서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공연 전 테이트 모던을 관람한 터라 아이는 피곤해했다. 공연을 보면 바로 잘 거라 예상했는데 아이 옆자리에 앉은 영국 할머니가 계속 아이에게 말을 걸어 스몰토크를 이어갔다. 할머니는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본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며 즐거운 관람이 되길 바란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아이는 할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는지 줄곧 바른 자세로 열심히 공연을 봤다. 2부 후반부에 남편 어깨에 기대어 잠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날의 관람 태도는 충분히 훌륭했다.
부소니의 피아노 협주곡은 나에게 생소한 곡이었다. 연주 시간이 70분이 넘어 다소 힘들었지만 피아니스트의 뛰어난 테크닉을 한껏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이 곡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악장에서 합창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공연장 꼭대기 층에서 울려 퍼진 합창은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다. 현실을 초월해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틀 동안 프롬스 공연을 관람하면서 버킷리스트를 이루었다는 성취감과 행복감이 온몸을 감쌌다. 원하는 것을 마음먹고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나중으로 미루거나 내가 할 수 있을까 의심하지 말고, 꿈꿔왔던 일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길 의지와 용기도 생겼다.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클래식을 감상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처럼 ‘더 많은 음악’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들었던 연주를 잊을 수 없다. 또한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내게 있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아들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와 아이를 업고 공연을 본 엄마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