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로운 반 아이들을 만나면 이렇게 나를 소개한다. “선생님은 책과 음악을 사랑하는 선생님이야.” 교실에서 나는 매일 아침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알림장 적는 시간에는 클래식 음악을 틀어준다.
어릴 적부터 교사가 꿈이었던 나는 이 직업을 진심으로 사랑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교사를 해보니 애정과 책임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교육 현장의 현실은 때때로 버거웠다. 오랜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내가 찾은 답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책과 음악이 있는 교실이라면 무엇보다 교사인 내가 신이 나고 그 행복감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교육이라 믿었다.
매달 한 권의 책을 정해 아이들에게 매일 조금씩 나누어 읽어주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10월의 책은 <바이올린 유령>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음악을 음식보다 더 사랑하는 제로라는 돼지로 연주 실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배짱은 넘친다. 제로는 우연히 바이올린 유령이 된 아인스 할아버지를 만나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법을 배우며 한층 성장하게 된다. 새로운 일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도전해보는 제로의 모습을 통해 아이들이 용기와 응원을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른 책이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돼지와 바이올리니스트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보니 책에는 자연스럽게 클래식이 여러 곡 등장한다. 우리는 그날 읽었던 부분에서 나온 음악을 유튜브에서 찾아 들으며 이야기의 장면을 좀 더 생생하게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평소 실제 공연장에 가서 음악 듣는 걸 즐기는 나는 교실에서 스피커로 듣는 음악이 좀 아쉬웠다. 마음속에는 늘 우리반 아이들과 함께 공연장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찾아오는 음악회’였다.
내가 사는 용인에서는 지역 도서관과 동네 서점에서 종종 음악회가 열리곤 한다. 책이 있는 공간에서 책을 주제로 한 실내악 연주는 이색적이면서도 큰 매력이 있다. 책과 음악의 만남은 깊은 여운을 남겨 음악회에서 소개되었던 책과 음악을 다시 찾아보며 빠져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래, 이런 음악회를 교실에서 해보자.’
그 후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연주 단체를 알아보고, 연주자 선생님과 여러 번 의견을 주고받으며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음악회 컨셉을 잡아나갔다. 음악회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데 담임 재량껏 쓸 수 있는 학급운영비를 특별한 경험을 위해 쓰기로 했다.
결국 오늘 2교시 우리반 교실에서 <책과 함께, 교실 마티네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 마티네(Matinee)는 프랑스어로 낮에 열리는 공연을 의미한다. 나는 직장 생활로 마티네 콘서트는 꿈도 꾸지 못했는데, 이번에 드디어 그 기회를 얻게 됐다. 음악회가 열린다고 주간학습안내를 통해 미리 공지했더니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기대에 들떴다. 음악회 당일이 되자 실제 공연장을 찾은 것처럼 아이들은 평소보다 더 멋진 옷을 근사하게 차려입고 등교하였다. 음악회 시작 전 티켓을 나누어주고, 아이들은 좌석 번호에 맞춰 자리에 앉았다.
첫 곡은 제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 스르르 잠들게 만들었던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였다. 실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시는 연주가 선생님의 바이올린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지자 아이들은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모두 숨을 죽인 채 미동 없이 바이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놀라운 집중력과 몰입을 보며 아이들이 음악에 제대로 빠져버렸다는 걸 느꼈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 연주를 듣고 나서는 제로 아빠가 음식을 뚝딱뚝딱 빠르게 만들고, 제로 엄마가 순식간에 설거지를 할 수 있게 도와준 음악이라며 책 속 장면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오늘 음악회에는 바수니스트도 오셨다. 바순은 흔히 볼 수 없는 악기라 아이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아이들은 자기들 키보다 더 큰 바순의 크기에 놀라워했고 부드러우면서도 개성 있는 바순의 음색에 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 곡은 제로가 바이올린 유령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연주했던 클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이었다. 바이올린과 바순이 함께 연주하는 <사랑의 기쁨>을 아이들의 눈빛을 보며 들으니 이 교실에서 매일 아이들과 함께 읽고 들으며 나누었던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뭉클해졌다. 오늘 아침 우리는 <바이올린 유령>을 읽고, “좋은 연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와 같단다.”라는 유령 할아버지의 말을 배움노트에 적었는데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지막 곡이 끝나자 아이들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 속에 앙코르를 요청했다. 앙코르곡으로 연주된 <문어의 꿈>에 맞춰 아이들은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영상을 촬영했는데 집에 돌아와서도 몇 번을 반복해서 봤다. ‘이렇게 더없이 소중한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감사함과 애틋함이 밀려왔다.
오늘 아이들은 집에 가기 전 다른 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한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교실 문을 나섰다.
“100년이 지나도 오늘 음악회는 잊을 수 없어요.”
아이들 마음속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는 일, 교사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