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저작권 사이에서

영감과 표절의 경계를 찾아가며

by Leafaleh

사랑으로 시작된 닮음


나는 호요버스라는 게임 회사를 좋아한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꽤 복잡하면서도 단순하다. 겉으로는 세련된 그래픽과 캐릭터 디자인, 풍성한 세계관이 좋아서였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나는 그 회사 안에 담긴 어떤 태도에 끌렸던 것 같다.

호요버스를 만든 사람들은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사랑했다. 지금 그들이 만드는 게임 속에서도 그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장면 하나, 대사 하나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함을 풍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감탄했던 무언가를 다시 살아나게 하려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만든 콘텐츠는 서브컬처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서브컬처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게임. 그 안에서 나는 동족애 같은 걸 느꼈다. "이 사람들, 그냥 돈 벌려고 이거 만든 거 아니구나." 그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더 열심히 그 세계를 즐기고 싶어졌다.

재미있는 건 그 과정에서 내가 몰랐던 많은 문화들도 알게 되었다는 거다. 나는 원래 넓게 문화를 소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좁고, 익숙한 세계에 머무는 편이었다. 그런데 호요버스의 게임을 하면서,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이거 에반게리온 패러디야", "이건 딱 그 장면 따라한 거지", "이건 좀 심하게 표절인데?" 하면서 알려주는 걸 보다 보면 "오… 저런 게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게 많았다.

어쩌면 그건 일종의 광고 효과였던 것 같다. 묻혀 있던 고대의 문화 조각들이, 새로운 콘텐츠를 통해 다시 빛을 본다. 소비자인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그 '닮음'이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진심 어린 닮음이 어떤 사랑의 형태처럼 느껴졌다.



창작자가 되어 마주한 현실


그동안 나는 소비자였다. 좋아하는 걸 골라 보고, 즐기고, 응원하면 그만이었다. 무언가를 만들지 않아도, 나의 감정은 충분히 중요했고, 정당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쓰는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최근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이 되면서 그동안 나를 감동시켰던 수많은 장면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쳤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그것들을 밀어냈다. '혹시 내가 흉내 내는 건 아닐까?' '이런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거 괜찮은 걸까?' 그런 질문들이 나를 조용히 압박했다. 나는 창작자이기 이전에, 아주 오래된 감상자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따라 한 게 아니야"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특히 어느 날, 다른 사람의 공모전 글을 읽게 되었을 때는 그 안에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도 비슷한 감정이 담겨 있어서 마치 내 마음을 누가 훔쳐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이 쓴 문장은 이랬다. "타인의 작품을 모방하고 싶었던 건, 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작품이 빛나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솔직하고 정확해서, 몇 초 동안 그 문장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면서 나도 조금은 안심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나도 그랬지.' 내가 그 장면을 따라 하고 싶었던 건 그 장면이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이 내 안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겁이 났다. 내가 이 감정을 그대로 쓰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표절은 단순히 콘텐츠의 유사함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백을 가져다 쓰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래서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문장의 빛을 그대로 베끼는 대신,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를 나만의 말로 꺼내기 위해. 그건 나의 고백이기도 했고, 내가 창작자가 되어가는 과정의 흔들림이기도 했다.



나만의 시선을 찾아가며


나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창작을 한다는 건 늘 새로운 줄타기 같다. 누군가의 감정을 빌리는 것도, 누군가의 구조를 떠올리는 것도 언제든 '따라 했다'는 말 앞에 맥이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다. 좋아한다는 것과 흉내 낸다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나는 단지, 내가 감동했던 장면을 내 안에 새기고 싶었고 그 감동을 내 언어로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세상에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다만, 완전히 나만의 시선은 있다. 내가 느낀 두려움, 내가 했던 고민, 내가 좋아했던 것들에 대해 내가 진심으로 썼다면 그건 '표절'이 아니라 '표현'이라고 믿기로 했다.

GPT가 무서운 이유는 그게 어디서 왔는지, 왜 그렇게 쓰였는지 '감정'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쓰는 글에는 감정이 있다. 고민이 있었고, 주저함이 있었고, 그리고 선택이 있었다.

나는 이제 깨달았다. 창작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감동했던 것을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싸움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닮은 글을 쓰지 않기 위해 나는 더 나답게 써야 한다. 그게 내가 영감을 존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더 이상 빛나는 것을 흉내 내려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 안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믿기로 했다.

누군가는 말한다. "쇼맨십을 하는 곳에서 철학하지 마라." 어쩌면 그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재미, 속도, 클릭 수가 중요해진 시대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생각한다. 창작자의 윤리, 저작권, 그리고 진심은 그 화려한 쇼의 뒤편에서라도 지켜져야 한다고.

나는 지금도 어떤 장면이 '영감'인지, '표절'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사랑'이 누군가의 권리를 짓밟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침해다. 그리고 그 경계를 알아보는 것 역시, 창작자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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