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의 보편적 고소득이 기만으로 보이는 이유
최근 열린 CES에서 현대 아틀라스가 유연하고 혁신적인 움직임으로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그 이상으로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이 이제 상상이 아니라 코앞까지 와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했다. SF영화 속에서 로봇,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실체화되면서 대중의 기대와 걱정은 교차한다.
새로운 미래는 디스토피아일까, 유토피아일까.
적어도 빅테크라고 불리는 기업들은 미래를 유토피아라고 꽤 낙관하는 듯 보인다. AI의 아버지 제프리 힌턴 박사가 '마법사의 제자'로 비유하며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이 뻗어나갔을 때의 인공지능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은 불안해하면서도 AI라는 마법에 점점 중독되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와중에 일론 머스크는 신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예상하는 미래에 대해 한껏 커다란 기대감을 드러냈다.
일명 보편적 고소득(Universal High Income).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더 이상 노동하지 않아도 생산이 이루어지고 기본적으로 모두 이를 소유하게 될 것이며 저축도 필요 없다.
AI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생산물 속에서 유토피아의 인간은 노동에서 벗어나 그 외에 무엇을 하면 될지만 고민하면 된단다.
"노동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의 기치이자 슬로건이 되어 왔던가.
창세 이래 노동을 통해 고통을 받았던 인류에게 노동을 거세한 자유를 주겠다는 선언이 들리고 그것을 실제 실현시킬 수 있어 보이는 자가 이를 말하고 있다면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핑크빛 청사진을 보며 허탈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비단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머스크의 예언은 전제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와 문화가 기록된 이후로 생산의 풍요로움이 보편의 풍요로움을 담보하지 않았던 것은 수천 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풍요는 분배를 담보하지 않는다.
소유의 가치는 결국 희소성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면 생산된 자원의 총량에서 누가 얼마나 소유할 것인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합의되지 못했다. 모두가 더 희소한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 싶어 한다. 가진 자들도 가지지 못한자들 모두 더 가지기 위해 몸부림친다.
산업혁명 시대 생산력이 올라가고, 괄목할만한 성장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이면에는 기계처럼 사용되며 고통당했던 노동자들이 있었고, 착취당했던 식민지가 존재했다.
과거 몇백 년 전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문제일까? 아닐 것이다. 잉여 생산물로 더 부유해진 사람이 있었고, 수렵채집 시대보다 가난한 사람이 공존하는 현상은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좀 더 가볍게는 당장 최근까지도 산지 출하된 농산물이 유통 단가가 맞지 않아 땅속에 그대로 갈아엎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는 세상이다. 자본의 논리, 돈의 논리로 남는 잉여 생산물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결코 충분한 만큼 전달되지 않는다.
가난한 자 약한 자들이 그나마 나은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아니 우리가 대다수라는 것. 그리고 그 대다수가 노동으로 자본주의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대다수가 노동했고 노동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기득권자, 가진 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었으며 인정받은 가치에 따라 분배받을 수 있었다. 국가, 권력, 자본가 등의 단어로 대체될 수 있는 이들은 곧 분배를 결정하는 자들이고, 수천 년간 이어져온 보편적 사회 문화의 순리였다.
미래라고 이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인가? 아쉽게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기술의 발전은 보편성을 담보하지 않았고, 발전을 독점한 사람들은 여전히 전체의 분배를 책임진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의 가치까지 사라진다면 대다수는 가진 자들의 선의와 도덕성에만 기대야 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과하게 비관적인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머스크의 보편적 고소득은 이러한 전제를 교묘하게 가린 채 전개된다.
결국 AI의 영향력을 더 넓히고 스스로 노동의 가치를 버리고, 생각을 거세하고, 나처럼 결정하는 자의 말에 따르십시오. 그럼 편해집니다. 그의 말은 이런 속삭임처럼 들린다.
그의 장밋빛 예언이 기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 풍요의 열쇠를 쥔 자들의 '선의'에 우리 생존권을 전적으로 의탁해야 한다는 노예적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발전으로 노동의 가치와 희소성이 옅어지는 미래는 그리 멀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 외에 우리의 존엄성을,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증명을 무엇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가진 자들의 자비와 도덕성에 기대지 않고 사회 문화적 주체성을 담보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 것일까.
인간이 기계보다 더 나은 점, 대체할 수 없는 영혼의 증명은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
이것을 찾는 것부터가 도래할 AI와 공존하는 미래 세대를 여는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