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 서비스가 보편화되기 전, 친구들은 좋아하는 가수가 티브이나 라디오에 게스트로 등장하면 미리 알려줬어.
“다음 주 티브이에 윤종신 섭외됐대.”
“내일 라디오에 윤종신 나온대.”
이제 이런 역할을 SNS가 하고 있고, 홍보 수단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시대를 살고 있어. 그래서일까. 사람이 직접 좋은 소식을 전해주던 온기가 떠오를 때가 있어. '직접 연락'의 시기였지. 이제는 그런 행동 패턴은 종결된 게 아닌가 싶어.
직접 소통이나 음성 연락이 부담스러운 시대가 된 것 같아. 개인 휴대폰이 생기고 메신저가 보편화되면서 오히려 연락의 폭이 줄어드는 거지.
글자로는 소통해도 목소리는 오히려 너무 직접적인 거야. 너무나 쉽게 연락할 수 있으니, 오히려 연락을 안 하는 게 더 좀 애틋한 느낌 같은 거, 그런 반대급부의 마음이 생겼어. 어디서나 누군가에게 계속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좋을 때도 있겠지만, 가끔은 그게 숨 막히기도 하고 모든 연락매체가 끊긴 곳에 홀로 존재하고플 때도 있거든. 요사이는 직접 전화하던 사람마저 메시지로 교류하게 되고, 문자로 하던 연락은 인스타 메시지처럼 바로 확인하지 않아도 티가 덜 나는 툴이 좀 더 심적으로 편한 느낌이야. 일대일로 연결되어 있기에 오히려 그게 더 부담스러울 때가 있거든.
동전을 찾아 공중전화를 하거나, 집 안 거실의 전화를 일부러 찾을 일이 사라졌어. 더 이상 ‘몇 월 며칠 몇 시에 누가 어디에 나온대’ 개인적으로 알려주지 않아도, 홍보를 대신 해주는 직업인들이 많은 시대잖아.
티브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볼 때면, 가끔은 어딘가 이어져 있었던, 그리운 옛날 사람들이 떠올라. 내게 이 시각 윤종신이 출연하고 있다고, 호들갑스레 연락하던 친구들. 물론 나도 친구들이 좋아하던 가수나 배우가 등장하는 날은 잊지 않고 알려줬어. 그 소식의 전달자는 그 습관 때문이었을까. 결국 그런 일을 챙기는 직업인이 되었지. 연예부 기자로 방송사 담당을 할 땐 그런 예고 기사를 쓰기도 했지. 편성피디로 일할 땐 프로그램 타임테이블을 챙기면서, 특정 개인에게 알려주던 버릇이 불특정 다수 타인에게 알려주는 커뮤니케이터로 연결되기도 했어.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른 지금은 사람과 사람 간 정서를 연결하는 맥락이, 생활의 버팀목처럼 존재하는 거 같아. 지금 이렇게 과거 어느 시절의 기억을 그리워하는 사람인 채로, 여전히 누군가가 기뻐할 소식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사람으로 말이야. 그게 비단 연예 뉴스만은 아닐 테지만, 열심히 ‘퍼다 날랐던’ 행동이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아.
다시 목소리나 대면을 선호하는 시대가 돌아올까? 휴대폰 각종 어플리케이션들과 키오스크를 이용하면 어떤 날에는 하루 한 마디도 안 하고 일상을 사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떤 걸 얻게 될까? 편리해지고 상호 대면이 불필요하니 생활이 덜 번잡해지는 걸까? 아니면 깊은 외로움을 체화하게 될까.
무심코 길을 걷다 공중전화 박스를 보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가 있어. 편안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하는 사람, AI 음성이나 유명인의 토크쇼 발화나 읽어주는 책 말고 정말 이순간 대화를 하고 있구나 느끼는 사람, 그리고 전화를 끊고 바로 만나러 가고 싶은 정서를 안겨주는 사람.
015B 1집에 윤종신이 부른 ‘텅 빈 거리에서’라는 곡이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노래야. 공중전화 이용률이 낮아진 시대에 다시 리메이크 되었지만 여전히 애틋한 노래. 외로운 마음을 동전에 투영하는데, 사실 요샌 동전도 들고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잖아. “외로운 동전 두 개뿐”이라던 홀로 남은 전화박스 속 애달픈 정서를 아는 사람. 이젠 나조차 공중전화 요금이 대체 얼마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심지어 개인적 통화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음에도, 어느 날 피곤에 찌들어 집에 들어가다 떠올랐어. 그렇게 통화를 좋아하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밤새 전화로 떠들어도 피곤해하지 않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삐삐를 녹음하며 즐거워하던, 누군가의 연락을 내내 기다리던 나는 그 연락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나. 전화가 와도 받기 싫은 내가 나일까, 그토록 전화를 붙들고 내려놓지 않고 밤새 얘기하던 내가 나일까, 둘 다 나일 테지만, 지금 내가 기다리는 간절한 연락은, 듣고 싶은 목소리는 무얼까. 그런 생각들을, '텅 빈 거리'에서를 듣다 보면 하게 돼.
삐삐 시절 동전을 들고 공중전화로 달려가던 나, 녹음된 음성을 확인하던 나, 그 텅빈 거리 안에서 나는 자라고 있던 걸까.
요새 통화는 대개 업무적인 내용으로 꽉꽉 짜여 있어. 사람과 말한다기보단, 저기서 일하는 이와 여기서 일하는 이가 업무적 정보를 교환하거나 협의하고 안내하는 일. MBTI 엔프피로서는 매우 곤혹스럽고 당혹스러운 통화야. 매순간을 노래하듯 살 순 없고, 낯선 이와 업무적으로 감정 교류를 할 일도 드물지만, 정서적으로 반갑게 나누는 통화를 갈구하기도 해. 나는 문자보다는 삐삐 음성녹음을, 삐삐 음성녹음보다는 통화를 좋아했던 사람이었거든. 나도 변하고 세월도 변하고 타인도 변하고, 이젠 전화라는 대상에 대해 사람은 점점 다른 패턴을 갖게 된 거 같아. 내가 아는 타인 중에는 전화를 울리기보다는 메시지로 남기길 바라고, 그 메시지도 바로바로 확인하지 않는 작가들이 많은 편이야. 그게 내겐 어딘가 세련된 느낌이 들곤 하지. 그런 개인주의는 사실 나도 지금 너무 좋아하는 건데, 감성이 과하거나 날씨 영향을 받는 날이면, 나는 통화를 좋아했던 사람인데, 라는 의문이 떠올라. 이젠 통화가 끌리지 않는, 어쩌면 가끔은 피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 너무 낯설어.
누군가의 노래를 들을 때면 누군가를 떠올리고,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바로 연락하던 그런 직접적 낭만(?)은 이제 그저 서로 모른 채로, 드러내지 않는 누군가의 마음 안에서만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