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그 시절 사랑했던 발라드
어린이일 때 연애편지를 받았던 어느 순간을 기억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하굣길에 편지를 줬다. 사랑을 늦게 알아봤다며, 이제라도 알게 돼 다행이라는 내용이었다. 열두 살의 뒤늦은 깨달음? 그 마음을 세심히 존중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바로 편지를 찢어 버렸다. 구태여 쾌활해 보이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장난으로 치부하곤 횡단 보도 앞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 순간에도 이건 아닌데.... 하는 후회를 하면서도, 행동과 생각은 달랐다. 사실 친구들 다 보는 데서 좋아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들 다 있는 데서 편지를 주고 간 것도, 그 사람이 바로 나랑 제일 친한 친구라는 것도, 그게 다 쑥스러웠다.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이미 교실에 소문이 퍼졌다. 당시 반장였고, 그가 부반장이었다. 그런데 남녀 부반장이 한 명씩 둘이 있었는데, 그 둘이 사귀는 사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졸지에 친구는 바람 핀(?) 이미지가 되었다. 또 다행인지 어쨌는지, 내가 편지를 찢어버리면서 우리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닌 게 됐고, 그 역시 소문에서 빠져 나왔다. 친구는 며칠 삐쳐(?) 말을 안 하다가, 도로 예전처럼 편한 사이로 돌아왔다. 잠깐이지만 친구랑 내가 멀어질까, 나도 걱정했던 거 같은데, 학교를 졸업하며 결국 좀 서먹서먹해지고 멀어졌다. 어른이 된 이후로도 가끔 이런 일이 반복되어, 그때의 경험이 원체험인가 싶었다. 그리고 이성 친구나 이성 친구의 연인을 극도로 조심하는 사람이 되었다. 허물없이 말하고 장난치고, 서로 짓궂게 놀리면서 편하게 부탁을 많이 하는 관계? 그게 사랑일까. 나이가 들어도 그 관계성은 정답을 모르겠다. <미우새> 양정아, 김승우 연예인 이성 친구 에피소드를 보면서도 감정이입이 되곤 했다. 둘은 오랜 친구이면서 묘하게 연인 같기도 했는데, 다시 편한 친구로 돌아갔다. 방송에서 뒤늦은 ‘썸남썸녀’처럼 그려지며 이내 연애물 루틴을 밟다가 ‘우리는 우정이지’로 얘기는 종료되었다. 둘 마음이 모두 이해 됐다. 우리가 사랑일까, 사랑이었을까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 우정을 지속하고자 사랑을 놓아버렸다가 우정을 놓치기도 했던 관계들이, 어른이 되니 남일 같지 않다. 세월이 흐를수록 타인을 서로 알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잘 쓰지 않기 때문에, 학창 시절이나 유년기, 청년기 때 맺은 우정의 관계는 어느 한 명이 크게 실수하지 않는 이상 쉽사리 끊어지진 않으니까. 서로 조심만 하면 영원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현실은 그렇게 잘 안 흘러간다.
초등학교 시절 이성 친구와는 책을 교환해 읽는 사이였다. 지경사, 열림당 등의 어린이 출판사 명랑소설, 명작소설 시리즈. 이야기 수다를 떨거나 그 책에 대한 얘기를 쪽지나 편지로 주고 받기도 했다. 기록은 결국 기억을 낳는다. 연애편지말고 그저 신변잡기적 스토리. 그처럼 세심하고 친절한 친구들을, 대학에 가서도 많이 만나게 됐다. 그 친구는 아마도 내 20대 시절의 ‘원조’였나 싶다. 친절함과 세심함, 자상함을 두루 갖춘 이성 친구. 무얼 부탁해도 편하게 들어주던 국문과 친한 친구들. 사회 나오고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던 사이, 그때의 친구들처럼 섬세한 사람이 조직엔 별로 없단 걸 알게 됐다. 그들도 야생에서는 학창시절 세심함과는 거리 가 먼, 투박한 이들로 사는지는 알 수 없다. 국문과를 졸업한 이들과도 그런 얘기를 종종 했다. 사회를 나와보니 모든 조직에서 국문과 같은 그룹은 희소성이 강하다는 것. 이성 친구를 국문과 스타일로 만난 이들은, 평생 그런 친구들을 사회에서 만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그 단짝은 아마도 내가 훗날 이런 친구를 만나게 될 거란 사실을 미리 예견했던 이가 아닐까. 먼 미래에서 온 친구랄까. 대학 시절 그 역시 다른 대학의 국문과를 다니고 있단 것을 알았을 때, 그 점도 신기했다. 어린 시절 그와 서로 친구가 아닌 좀 더 각별한 사이였다면, 뭔가 기억이 달라졌을까? 그때 의도찮게 편지를 찢긴 했지만, 당시 글자 읽는 속도가 빨라 얼른 편지를 스캔했다. 가장 뇌리에 남았던 건, 그가 편지를 쓰는 와중에 듣던 노래였다. 그 노래를 틀어놓고 나를 떠올리며 편지를 쓰고 있다고 썼다. 김민우의 ‘휴식 같은 친구’. 90년대 이랜드 옷 광고 CF 음악으로도 쓰였다. ‘너는 언제나 나에게 휴식이 되어준 친구였고’라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노래다. ‘너의 얼굴을 보면 편해진다고.’ 김민우는 90년대 데뷔하자마자 인기를 얻은 가수로 지금은 수입차 딜러로 유명하다. 그의 발라드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정말 좋은 친구란, 만나면 불편함 없이 그저 편한 상대, 꾸미지 않고 그대로를 보여줘도 되는 이다. 애써 잘살고 있는 척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 사회생활이 불편하고 피곤해도 얼굴만 보면 ‘편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가끔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떠올릴 때 들어보면 어릴 적 기억만이 아니라, 그저 지금에도 좋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휴식 같은 친구>.
https://youtu.be/s3dPFTUlqhQ?si=z-3s_q-bQsvuTc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