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 20년 만에 TV 중계 중단
미란다 커, 지젤 번천. 내로라하는 셀러브리티의 등용문과 같았던 패션쇼가 있었다. 바로, 미국 언더웨어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Vicoria's Secret)이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잘록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와 가슴 그리고 늘씬하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9등신의 비율의 모델만을 쇼에 세우며 포지셔닝해갔다. 남성들에게 판타지를 선물하겠다는 빅토리아 시크릿의 패션쇼는 20년 만에 TV 중계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빅토리아 시크릿(Victoria's Secrets, 이하 빅시) 속옷 브랜드로 전 세계에서 이만큼 사랑을 받은 브랜드가 있었을까. 화려하고도 다양한 패턴, 보정 효과가 엄청난 제품들 그리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직원들까지. 한국에 없기 때문에 더 희귀했고 또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였기에 더욱 갖고 싶기도 했다. 빅시는 비단 속옷뿐만 아니라 그들이 판매하는 수영복, 바디 퍼퓸 또한 큰 인기를 끌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의 20대 초반 까지만 하더라도 빅토리아 시크릿이 선보이는 미의 기준은 곧 교과서와도 같았다.
우선 빅토리아 시크릿을 브랜드 관점으로 살펴보자. 빅토리아 시크릿은 그들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섹시함’으로 정의하고 여성의 굴곡과 성적 매력에 방점을 찍었다. 그들의 네이밍은 곧 그들의 콘셉트를 대변한다. 19세기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은 코르셋으로 여성의 곡선을 강조했는데, 그런 빅토리아 여왕의 상징성과 베일에 숨겨진 모습을 나타내는 시크릿(Secret)이 결합되어 탄생했다. ‘섹시, 유혹’이라는 콘셉트는 그들이 제품, 디자인, 매장 경험까지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빅시에게 여성의 섹시함은 가장 중요한 RTB(Reason to Buy)이고 그들의 커뮤니케이션 전략 또한 이 판타지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최우선시되었다.
대표적인 고객 접점 중 하나인 빅토리아 시크릿의 스토어 또한 핑크색과 보라색을 주요 색상으로 활용 해 주목도를 높였고, 빅시 매장의 점원들은 속옷 컨설턴트라도 된 듯이 친절하니 그들의 대우를 받고 있자면, 나 또한 빅시의 모델들처럼 될 수 있을 것 만 같은 상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지난 수년간 빅시의 가장 주요한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패션쇼였다. 매해마다 패션쇼의 피날레를 장식할 ‘엔젤’은 누가 될지 축하공연은 어떤 셀러브리티가 진행할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 패션쇼는 1995년에 시작되어 2001년부터는 미국 3개 지상파를 통해 TV 중계 됐다. 기억에 남는 건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Sexy Back 노래가 전 세계를 강타할 때, 그는 빅시 패션쇼의 길이길이 기억될 퍼포먼스를 남겼고 그의 노래 가사와 찰떡인 패션쇼는 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한 때 미국에 좀 있었다 하는 남자들에게 빅시의 패션쇼는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대체하기에 충분했고, 헬스장에 갔을 때 빅토리아 시크릿의 패션쇼 영상을 틀어 놓고 약 30분가량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조깅하는 사람도 봤다. 당시는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건 줄도 몰랐다.
하지만 TV 중계 20년 만에 빅토리아 시크릿은 그들의 가장 주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 중 하나였던 패션쇼를 돌연 중단하기로 했다. 여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남성들에게는 판타지의 대상이 된 엔젤을 이제 더 이상 TV를 통해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요한 요인은 TV 중계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마켓 쉐어와 매출이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청률이 더 높았다면 시청률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겠지만 그도 녹록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해, 빅시의 전략은 더 이상 소구 되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된 것이다.
그들의 성장세는 2010년 중반에 접어들며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2018년 빅시의 패션쇼 시청자 수는 330만 명으로 970만 명이었던 2013년의 시청자 수 대비 1/3 가량 줄어들었다. 모기업의 주가는 2019년 한 해에만 43%가 감소했다. 그들의 브랜드 콘셉트와 커뮤니케이션은 강렬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브랜드였기에 지금의 하락세가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다.
한편, 지난해 12월 빅토리아 시크릿을 대표하는 CMO(최고 마케팅 책임자)는 ‘트레스젠더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빅토리아 시크릿의 판타지가 아니기에 무대에 세우지 않겠다’고 했다. 즉, 최고 마케팅 책임자 스스로 빅시가 이용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판타지라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사실 이러한 발언이 몇 년 전에 있었다면 용인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성을 존중하고 스스로의 몸 자체를 아껴주고 사랑하자는 body positivity가 시대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금. 누군가를 대상화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비자와 여론의 비판을 받기 충분했다. CMO의 실언 이후 플러스 사이즈의 일반인, 트레스젠더들 까지 가세해 빅시 앞에서 크고 작은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빅시와 동일한 산업에 있든 타 속옷 브랜드의 실랄한 비판이 이어지기도 했다.
You market to men and sell a male fantasy to women. But at ThirdLove, we think beyond, as you said, a ’ 42-minute entertainment special.’ Your show may be a ‘fantasy,’ but we live in reality. Our reality is that women wear bras in real life as they go to work, breastfeed their children, play sports, care for ailing parents and serve their country.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타인의 시선, 정형화된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 나만의 편안함,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비 현실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를 가진 브랜드라면 사람들은 쉽게 등을 돌린다. 반면, 나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혹은 나다움을 강조할 수 있는 브랜드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다양화된 문화와 가치관에 기여하고 있다.
미국 브랜드 아메리칸 이글의 속옷 브랜드 ‘에어리(Aerie)’는 광고에 포토샵을 하지 않은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모습을 강조하며 되려 사랑을 받고 있다. 에어리는 런칭 이후 12분기 연속 매출 성장을 이뤘다. 그리고 가수 리한나(Rihanna)도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했는데, 다양한 체형과 피부색을 가진 모델을 내세운 ‘새비지 X 펜티(SAVAGE X FENTY)’ 또한 지속 성장을 이어가는 중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나다움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제품이 성장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엄청난 다짐과 변화를 행하지 않는 이상 이전의 명예를 가져오긴 어려워 보인다. 브랜드도 곧 사람과 같아서 시대를 읽지 못하면 그리고 그에 맞는 변화를 하지 않는다면 서서히 잠식된다. 재밌는 것은 브랜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기도 하지만, 변화된 세상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곧장 버려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어떤 산업보다도 브랜드가 이 세상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빅토리아 시크릿 관계자는 TV 중계를 멈추는 것일 뿐 디지털화된 방식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웬만해선 어느 디바이스로도 다시 보고 싶진 않다. 이제 환상 속의 엔젤은 환상에서만 존재하길.
이게 바로 브랜드가 세상에 밝아야 하는 이유다. 과연 한국의 속옷 브랜드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 해 갈까. 빅토리아 시크릿이 좋은 교육의 사례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