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런 Mar 06. 2024

그 해, 아버지와 나

3화_ 두 사람의 새로운 한 걸음

1996년, 드높은 푸른 하늘의 10월  

   

작은 시골 마을을 에워싼 산등성이 사이로 잠시 헤어졌던 해가 고개를 내밀며 능선을 따라 어둠을 밝혀온다. 농사를 짓는 농가들로만 이루어진 시골 마을은 정확하게 숫자로 구분 지어진 시간을 따르기보단 어찌 보면 기계화된 물리적인 시간 개념보다 오히려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 자연의 흐름에 따라 생활한다. 해가 뜨는 시간, 즉 날이 밝아오는 시간이 곧 하루를 시작하는 기준이었고, 해가 지는 때가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이었다. 처음엔 수탉의 울음소리가 시골의 아침을 깨울 것이라고 상상했었지만, 정작 나의 아침을 깨우는 건 할머니의 아침식사 준비하는 소리, 할아버지의 마당 쓰는 소리였다. 내가 지낸 시골 마을의 수탉은 일찍이 일어나 마당 한 귀퉁이 오래된 감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이름 모를 작은 새, 초가지붕에 3평 정도 되는 외양간에서 우는 앞집의 암소보다 게으른 게 분명했다. 시골의 아침을 알리는 정감 있는 다양한 소리 중에서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고, 그립기도 한 것은 무쇠 가마솥의 뚜껑을 여닫는 소리다. 솥뚜껑은 무거워 들지 않고, 옆으로 밀어서 여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뚜껑이 솥을 긁어대며 내는 기억 속의 마찰음은 지금도 할머니의 사랑, 정성이 담긴 음식, 부지런함 같은 따뜻한 무언가를 연상케 한다.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낸 시골집도 현대식 주방으로 탈바꿈하면서 바뀌어 있었지만, 사랑방만은 아궁이의 불을 지펴 방을 데우는 온돌 형태를 유지했었고, 큰 가마솥이 아궁이 위에 놓여 있었다. 가마솥은 사골을 우리거나, 닥나무 껍질을 삶거나, 꺾어 온 고사리와 메주를 만들기 위한 콩을 쪘다. 고사리는 푹 쪄서 햇볕에 말리면, 우리가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말라비틀어진 모습이 되었고, 닥나무 껍질은 삶은 다음 속껍질을 한번 더 벗겨내 한지를 만드는 공장에 팔 수 있었다.


한창 키가 클 나이였던 탓인지, 쫓기듯 가야 할 목적지가 없던 탓인지 아침상이 다 차려진 뒤에라야 밥 먹으라는 부름에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새벽 4-5시면 하루를 시작하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에는 무척이나 게을러 보였으리라. 하지만 손자의 게으름에는 한없이 너그러우셨다. 밥은 늘 고봉밥이었다. 밥그릇도 요즘처럼 작지 않았을뿐더러, 공깃밥 2개가 거뜬히 들어가는 큰 밥그릇 위로는 항상 언덕이 있었다. 어차피 다 못 먹는 양인데, 처음부터 적당한 양을 주시면 안 될까?라는 의문을 품은 적도 있지만 할머니에게 밥을 넉넉하게 퍼주는 것은 먹을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었고, 당연한 것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할머니가 주시는 고봉밥의 절반 이상은 드시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남긴 적이 없었다. 끼니마다 나오는 국과 다양한 반찬으로 차려진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밥상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꽤 많은 양을 남김없이 먹었던 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마음을 든든하게 채우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6개월 간의 휴학 기간 동안 잠이 덜 깬 상태의 아침식사와 간단한 세면 후에는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아버지와의 산책이 뒤따랐다. 산책은 시골에서 재활을 했던 아버지의 빠트릴 수 없는 아침 운동이었고,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자연환경에 대한 체험과 공부 그 어디쯤인 시간이었다. 집 뒤편이 바로 산이었고, 뒷마당 한쪽에 올라갈 수 있는 샛길이 있었다. 샛길을 통해 우거진 수풀 사이를 통과하듯 50m가량 걸어올라 가면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정도로 다듬어진 산길이 나왔다. 온갖 낯선 식물들이 즐비한 뒷산 산책로는 처음 보는 궁금한 것들로 가득했고, 모르는 것이 없는 아버지와의 대화는 쉴 틈이 없었다.



'아빠, 저 나무는 무슨 나무야?' '저 꽃은 이름이 뭐야?' '여긴 누구네 밭이야?'...

'저 나무는 복숭아나무야..' '저 꽃은 산딸기 꽃이야..' '여긴 큰 할매네 밭이고, 저긴 옆집 아재네 밭이야'...


그리 높지 않은 산을 능선과 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사과밭, 복숭아밭, 고추밭을 지나고 몇 대 위의 조상님 산소를 지난다. 그렇게 산책 코스를 한 바퀴 돌아오면 한 시간 남짓 걸렸는데, 가끔 뱀을 마주치는 것을 제외하면 아침 산책은 꽤나 기분 좋은 일과였고, 즐거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었다. 겉보기엔 아침 운동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적인 산책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저 단순히 산책을 위한 시간이 아닌 많은 생각과 불안한 마음을 비워냈던 치유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서로 온전히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모르는 것마다 사전을 찾듯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질문 세례를 쏟아붓는 아들과 걷는 길과 눈에 보이는 풍경, 온갖 식물과 벌레들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성실하게 알려주는 든든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던 산책길은 당시의 우리 부자(父子)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간과 공간이 되어 주었다.


자연과 함께하는 아침 산책 그리고 딱히 할 일이 없던 소년은 약초를 캐러 앞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뒷산 깊은 골짜기로, 농약을 치러 집 앞 텃밭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냇가로 다니며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세상의 모든 상처를 품어줄 듯이 넓은 자연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자연의 품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골 생활이 익숙해질수록 세상의 복잡한 이야기들, 머릿속의 부정적인 생각들, 마음속의 아픈 상처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었고, 그 자리는 웃음희망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새로운 한걸음을 힘차게 내디딘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그 해, 아버지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