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를 쓰게된 계기
약 2주전의 이야기다.
나는 신림에서 같이 노는 멤버들이 있다. 서울에서 첫 자취를 신림에서 했고, 신림을 선택한 이유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살고 있어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임용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홀로 서울에 올라온 나에겐 우울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잠실로 이사를 간 뒤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신림을 찾아간다. 함께 해외여행도 가고, 이번 5월 연휴에는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으며, 7~8월쯤에는 일본도 가볼까 생각 중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신림을 갔고, 분위기 좋은 바를 찾았다. 저번에 한 번 가본 곳이었는데, 조용하면서 분위기가 좋아서 이번에도 가기로 했다. 나는 술자리는 좋아하지만,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달달하고 도수가 낮은 ‘도화’라는 칵테일은 정말 매력적인 술이었다.
9시부터 마셨고, 원래는 막차까지만 놀다가 집에 갈 예정이었다. 분명 내 기억에는 막차가 12시 넘어서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12시 전에 지하철이 끊겼다. 나는 그냥 택시를 타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정까지 ‘도화’ 두 잔을 마시고 바로 집에 갈지, 술을 조금 더 마실지 고민하던 중 비가 오고 날씨도 추웠다. 그러던 차에 횟집이 보였고, 따뜻한 매운탕이 생각났다. 결국 가볍게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신림에 살 때 몇 번 가본 횟집이었다. 원래는 매운탕만 먹으려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회/산낙지/해산물/매운탕’이 나오는 세트 메뉴를 시키게 됐다. 부산에서 20년 넘게 살다 온 나에게 서울에서 먹는 회는 늘 아쉬움이 남았다. 솔직히 만족스러운 횟집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 집도 갈 때마다 회 상태가 별로였던 기억이 있어서 그냥 매운탕만 시키려 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회가 완벽하진 않아도 식감이 괜찮았다. 매운탕도 매우 훌륭했고, 면을 좋아하는 나답게 라면 사리도 추가해서 든든하게 식사를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2시 30분. 더 놀지 말지 고민했지만, 일행 중 한 형이 너무 피곤하다고 해서 결국 집에 가기로 했다.
일행들은 나에게 택시를 잡으라고 했지만, 나는 신림역 근처에 택시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래왔기 때문에 굳이 미리 잡지 않아도 될 거라 판단했다.
그런데 막상 세워져 있는 택시가 없어서,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침 나를 향해 오는 택시가 있었고, 기다려주던 형이 "비싼 택시 아니야?"라고 물었다. 나는 EV6(기아의 전기차)인 줄 알고 "아냐, 일반 택시야"라고 대답한 뒤 그냥 탔다.
그런데 막상 타고 보니 일반 택시가 아니었다. 내가 흔히 타던 택시와는 달랐다. 자동문이 달려 있었고, ‘아이엠택시’라고 적혀 있었지만 나는 우버나 카카오택시 같은 플랫폼 택시라고만 생각했다.
기본요금이 6,500원이었다. (일반 택시는 할증시간 기본요금이 5,800원) 택시를 타자마자 검색을 해보려 했는데, 그 사이에 요금이 1,000원 넘게 올라가 있었다.
처음에는 당장 내릴까 고민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신림에서 서울대입구역을 지날 때 이미 10,000원을 넘겼고, 지금이라도 내릴까 엄청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냥 ‘일주일 집에서만 있자’는 생각으로 계속 탔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글로 남기면 나중에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지만, 미터기 올라가는 속도를 보고 술이 확 깼다.)
밖을 보니 예술의 전당을 지나고 있었다. 요금은 21,000원.
평소 신림에서 집까지 할증이 풀리면 22,000원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지금 이 속도로라면 3만 원은 가뿐히 넘을 것 같았다. 심하면 4만 원까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이걸 글로 남기기로 하기 전에는 엄청난 현타가 왔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다들 택시 잡으라고 할 때 그냥 잡을 걸…’
‘잘못 탄 걸 직감했을 때 바로 내리고 다른 택시를 탈걸…’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원래는 여동생이 준 카드로 결제하려고 했는데, 미안해서 하지 말까 고민 중이다. 그런데 또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내 사업 소득이 크지 않아서 연말 정산 혜택도 딱히 없으니 여동생이 혜택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미친 듯이 올라가는 미터기를 보며 현타를 느꼈고,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태연 콘서트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가계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3월 한 달 동안은 의식적으로라도 가계부를 구글 스프레드에 작성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집 근처까지 왔다.
주소를 말씀드려서 신경을 써도 되지만, 집 근처는 일방통행이 많아서 조금 돌아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특정 모퉁이에서 우회전해달라고 기사님께 말씀드렸는데, 기사님이 잘 못 들으셨는지 "여기서 세워드릴까요?"라고 물으셨다.
택시비도 너무 많이 나왔고, 다시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네, 여기서 내릴게요"라고 했다.
33,800원.
살면서 이렇게 비싼 택시비를 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평소보다 먼 거리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신중하게 택시를 잡아야겠다는 생각.
가계부를 써서 소비 습관을 점검해야겠다는 생각.
3월의 시작이 찝찝하긴 하지만, 이 또한 좋은 경험이고 좋은 시작을 위한 액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새벽 4시쯤 이렇게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