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밴스, <힐빌리 이야기>
미국 중북부의 몰락한 공업지대를 뜻하는 러스트 벨트는 자동차 및 철강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등을 아우르는데, 이들은 과거 미국 제조업의 대표 주자였으나 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서며 심각한 불황을 맞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더 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언론은 통계지표를 이용해 이 지역이 겪고 있는 문제를 수량화 하는데, 주로 평균을 웃도는 범죄율, 미국 내 최고 살인 사건 발생률, 1/3에 달하는 극빈층 비율 등의 지표로 이 지역이 겪고 있는 문제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정치인들은 그런 문제들이 불황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일자리 창출이 해법이 될 것이라 믿는 듯하다. 그러나 <힐빌리 이야기>는 그런 해결책을 제시하기 이전에 먼저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불황을 떠안은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계층은 선거철마다 이슈가 되곤 했다. 그런데 이들이 조금 더 주목받게 된 것은 러스트 벨트가 지난 2016년 미국 대선 결과를 가른 중요한 승부처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백인 노동자 계층 유권자들이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을 선택함으로써 선거의 향방이 갈렸다는 평가들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민주당이 지난 정권 동안 이 지역을 상대적으로 외면한 반면, 공화당의 트럼프는 선거 유세 기간 동안 이 지역을 돌며 빈곤 노동자 계층의 마음을 사는데 전략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트럼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시골 지역 노동자들은 ‘힐빌리’, 혹은 ‘레드넥’이라 불리는데, <힐빌리 이야기>는 이들의 삶의 전형을 서술함으로써 정치적 이슈로 가공된 힐빌리가 아닌, 실제 힐빌리의 삶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어 시의성을 얻게 되었다.
빈곤층을 지원하여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게 돕는 사회의 몫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원사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위해 가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원인에 걸맞은 대책을 마련하여 가난의 대물림을 막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원인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어떤 원인을 조명하든 그것은 가난의 단편밖에 비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저 ‘가난이 이렇다’를 서술하는 것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저자이자 주인공인 J.D.밴스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시골 사람들이 산업이 고도화됨에 따라 공장 노동자로 변모하여 도시로 이주하고, 산업과 지역경제의 몰락과 함께 다시 빈곤층이 되는 과정을, 자신과 가족의 일대기를 통해 보여준다.
가난의 굴레는 벗어나기 어렵다. 가난하기 때문에 양질의 교육을 받기 어렵고, 건강한 음식을 먹기 어렵고, 불안정한 직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교육받지 못한 이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투박하고, 이는 보통 총기와 폭력을 동반하곤 한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가정 환경 또한 심각한 갈등의 연속이고, 부모들은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고 약물에 빠지기도 하며, 아이들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망가진 공교육 체계는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사회 또한 이들에게 나태함의 낙인을 찍는다.
이러한 가난에 대한 서술은 저자의 일대기 속에서 실타래처럼 얽히며 현실성을 얻고, 독자로 하여금 가난의 원인을 논리적으로 찾게 만드는 대신 가난의 현상을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는 독자가 가난한 이들의 일상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고, 일견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불행에 맞서고자 하는 가난한 이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과거 힐빌리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과정, 그리고 정당한 노동을 통해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가난한 이들의 의지를 꺾는 불량수급자들의 행태로 인해, 가난한 이들이 복지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는 아이러니를 설득력있게 그린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그것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난의 현상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벗어던지기 위한 다양한 해결책의 출발점이 된다. 경제적인 불황을 벗어나게 해줄 일자리에서 더 나아가,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가족 구성원, 삶의 목표를 만들어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멘토,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환경적인 서포트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자신을 돌이켜보며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했다.
대개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듣고나면 성취를 이룬 개인에게 모든 공을 돌린다. 악전고투한 이에게 주어지는 마땅한 보상으로써 마치 그것을 인정이라도 하듯이, 그정도의 의지와 능력을 겸비했다면 분명 성공할 줄 알았다며 축하를 보내는 이들에게서 정작 서사의 주인공은 공허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남고자 했던 역사가, 이미 성공한 이들이 그에게 보내는 가벼운 동정 섞인 축하의 재료로 소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어떤 일을 겪었고 그것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먼저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질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접한 이들이나 추천사를 쓴 이들은 <힐빌리 이야기>를 빈곤계층 노동자 집안 출신 아이의 성공신화이자 가난의 한가운데서 찾은 희망 정도로 포장하려는 듯 보인다. 힐빌리로 태어나 아이비리그 출신 변호사로 성장하기까지의 서사는 분명 ‘그게 가능해?’ 라고 되물으며 관심을 가질법한, 소위 팔릴만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정작 밴스는 책의 서두에서 이 책은 그런 서사를 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전한다. 자신은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포장된 겸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독자도 누구든지 나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최대한 배제하고, 과거 사건에 대한 감정을 날 것 그대로 전달하려 노력했다. 그로 인해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닌, 유년시절부터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사는 것에 대한 회고록이 되었다. 아마도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는 성인이 되고난 이후 마침내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만나게 된 복잡한 감정들을 글로 풀어내야 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글은 논리적이라, 수 백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쓰며 그것들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고, 아마 그것은 내적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이 되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