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가끔 스스로 명을 단축한다
생명은 가끔 스스로 명을 단축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고의적 악(惡)이 포함되지 않는다.
약 5년 전, 우리집 마당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제 집처럼 행동하는 길고양이에게 꼬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손바닥만한 녀석이 사람을 제법 잘 따랐다. 19년 정도 키우던 강아지가 죽고 나서 어떠한 동물도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한 우리 가족이지만 마당에서 키우며 적당한 거리를 뒀다. 물론 마음의 거리는 집 안에서 키우는 반려동물 수준으로 가깝다.
꼬맹이는 약 2년 전 3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올해 초 그 3마리의 새끼 중 둘째가 3마리의 새끼를, 셋째가 5마리의 새끼를 한 달 간격으로 낳았다. 그 중 둘째가 낳은 2마리는 죽었다. 둘째는 하나 남은 새끼를 돌보지 않았다. 셋째는 새끼들을 우리 집 천장 위에 낳아서 한 동안 우리 가족에게 밤에는 불면, 낮에는 소음이라는 일상적 괴로움을 주었다. 결국 천장을 뜯은 다음, 새끼들을 가까스로 잡아서 마당에 내려놓았다. 셋째는 자기가 낳은 5마리와 둘째가 돌보지 않는 1마리를 맡아서 키우고 있다.
오늘 새벽, 집 앞에서 새끼의 울음이 끊이지 않고 울렸다. 어린아이 울음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갈라진 소리로. 밖에 나가보니 앞집과 우리집 사이의 담벼락 옆에 주차해놓은 차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아마도 담벼락 근처에 있는 차 위에서 놀다가 아래로 떨어진 것 같다. 그 자그마한 몸으로 다시 차 위에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 했던 것이다. 새끼를 꺼내서 어미와 형제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놓으려 했으나, 새끼는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해가 떠도 끊이지 않는 그 소리에 괴로웠고, 이는 고양이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앞집의 노부부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낮에 밖에서 일을 보고 저녁 7시 반쯤 귀가했을 때 새끼의 울음에는 쉰 소리가 섞여있었다. 하루 종일 운 탓 일거다. 노부부는 길고양이 처리(?)업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어디에 숨었다가 나오는지 자꾸 마당에 나오고 쫓아내면 숨었다가 또 나온다”며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녀석들이 우리집에서만 놀기를 바랐지만, 녀석들은 우리집이든 앞집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 집 저 집의 개념도 없을뿐더러, 자신들을 좋아하는 것이 우리라는 것은 알아도, 싫어하는 것이 노부부라는 사실은 모르기 때문일거다.
노부부는 그들의 마당을 업자와 둘러보며 이야기 중이었다. 차 아래에 홀로 떨어져 있는 녀석은 계속 쉰 소리로 울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 울기 전에 얼른 꺼내야겠다는 생각으로 편의점에서 츄르를 사다가 꼬셔봐도 나오지 않는다. 잠자리채로 잡아보려했으나 차의 엔진룸으로 들어갔다. 그 작고 애처로운 생명은 계속 죽을 듯이 울어댔고, 노부부는 괴로움을 호소했으며, 처리업자는 덫 놓을 곳을 이야기했다.
울음소리는 바로 저 위, 담 너머의 어미와 형제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조금의 욕심이랄 것도 없는 본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의 본능 때문에 생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미와 형제들의 생 모두. 새벽부터 밤까지 쉴 틈 없이 울어댄, 목숨이 끊어질 듯 절박한 그 울음이 목숨을 끊어버릴지도 모를 단초가 된 것이다.
아무리 도와주려고 해도 계속 피하고 숨으니 방법이 없다. 차를 번쩍 들어서 신발 속 모래 털 듯 털면 녀석이 담너머로 갈 수 있을텐데. 궁여지책으로, 녀석이 스스로 차 위에 올라가서 다시 담을 넘어 갈 수 있도록 박스를 계단 형태로 쌓아 놨다. 하지만 녀석은 계속 쉰 소리를 낼 뿐 올라가지 않는다. 무슨 이유인지 어미는 새끼를 담벼락 위에서 내려다볼 뿐 데려가지 못하고 있다.
빠르면 내일, 처리업자는 녀석들이 즐겨 노는 앞집 마당에 덫을 놓을 것이다. 어미는 6마리에게 젖을 먹이느라 우리 가족이 사료와 참치캔 등을 풍부하게 공급해도 항상 말라있다. 어미라고 해봐야 고작 2살인 녀석은 배고픔으로 덫에 먼저 걸려들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이 돌보던 새끼들 6마리는 덫에 걸리거나, 젖을 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운이 더 나쁘다면, 꼬맹이와 첫째, 둘째 녀석도 잡힐 수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고의적 악도 없다.
방법이 없다. 길에서 사는 그 녀석들에게 먹이를 주고 친밀감을 형성한 우리 가족도 괴로울 만큼의 울음이다. 앞집 노부부의 괴로움이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앞집 노부부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고양이들에게 해코지 하지 않고 참아온 그들이다. 지금도 계속 들려오는 쉰 소리가 괴롭고, 그 녀석의 애끓는 마음이 괴롭고, 구해주려해도 피하는 모습이 괴롭고, 고양이 가족이 조만간 맞이하게 될 일도 괴롭고, 생이란 것이 이렇게 하잘 것 없이 느껴지는 것도, 그리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라는 것도 괴롭다.
하루 종일 울어대느라 진이 다 빠졌을 녀석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왔다. 2시간 정도 지난 지금 확인해봤으나, 조금도 먹지 않았다. 어쩌면 괴로운 쉰 소리는 먹지 않은 탓에 끊어질지도 모른다. 소리가 끊어지는 곳은 엔진룸일까, 바퀴와 휀다 사이일까. 아니면 운 좋게도 땅바닥일까. 어떻게든 어미와 형제를 만나고 싶어 쥐어짜내는 그 울음이 그치면 내 마음은 편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