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구

by 시간강사 K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 아예 눌러살게 된 이모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커다란 상자하나를 외할머니댁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발견한 신기한 물건, 새로 나온 물건, 한국에는 없거나 구하기 어려울 것 같은 물건들을 식구마다 하나씩 이름표를 붙여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냈다. 지금과는 좀 다른 1970년대였기 때문에 식구들은 그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즐거워했다.

7살 즈음에 내 이름표가 붙은 선물은 '전자계산기'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전자계산기였는데, 대체 이게 왜 내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선물에 붙은 사연은 미국 아이들은 입학하면 다 이런 걸 쓰더라며 너도 입학을 하니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실상 국민학교를 다니던 내내 그 도구를 사용해 본 적도 없고, 학교에서 가지고 오라고 한 적도 없었다. 그저 내게는 전화기도 둥근 다이얼을 돌리던 시대에 뭔가 버튼을 꾹꾹 눌러보는 것이 재밌는 물건일 뿐이었다. 마치 로봇 만화영화에 나오는 조작버튼을 누르는 그런 기분이었을까.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초중고 내 학창 시절 대부분의 기간이었던 1980년대에는 어른들의 입에 붙은 말 중 하나였다. "TV는 바보상자야. TV만 보고 있으면 바보 된다. 책을 봐야지!" TV가 나오는 시간이 그다지 길지도 않았다. 아침에 잠깐, 오후 5시 30분 넘어서 자정까지 방송되던 그 TV를 학교 다니는 애들이 보고 싶어도 볼 시간이 그리 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생각할 틈이 없이 정보를 일방적으로 쏟아내던 그 TV만 보고 있으면 책을 보는 것과는 다르게 나중에 어떻게든 나쁜 결과가 있을 것이라 어른들은 짐작할 수 있었나 보다. 아니면 TV 없이 자란 본인들보다 TV 보면서 자란 우리 세대의 생각이 모자라다는 것을 발견했을 지도.

내가 경험한 청소년기의 신물문은 저 정도였다. 쓰지도 않은 전자계산기와 볼 시간이 많지도 않았던 TV. 80년대에도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되었다고 하지만 너무 고가의 제품이라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 들여놓은 경우는 드물었고, 가끔 남의 집에서 구경이나 해봤을 뿐이었다. 90년대에 접어들고야 학교에서나 집에서 다루어볼 기회가 있었다.

새로운 도구는 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고,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갖고 있거나 쓰는 사람을 앞서 나가는 인물로 평가받게 해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쓰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당장 안되던 것들을 되게 해주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으니까.

30년이 흐른 지금 되돌아보니 다른 것들이 보인다. 전자계산기가 코앞에 있는데도 구구단을 외우고, 암산을 연습하며 지낸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굳이 계산기를 동원하거나 편의점 포스기에 바코드를 대기 전에도 대충 본인이 얼마나 지불해야 할지를 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전자계산기를 쓰던 사람들은 할 수는 있지만 속도가 느리거나 손가락을 동원하거나 전자계산기를 꾹꾹 눌러보고서야 안다. 지금도 우리나라 학생들은 스스로 계산을 하고 학습지 같은 것을 통해서 끊임없는 반복 연산 훈련을 아주 어릴 때부터 시키는 경우가 많으니 이 방면으로는 걱정이 없다.

그런데 TV 쪽은 좀 다르다. TV프로그램에 자막이 많아지고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이 장면에서 이렇게 반응해야 옳다고 알려주는 듯한 '궁서체' 자막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그 자막이 내 웃음을 더 빠르게 했기에 훨씬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막 없이는 웃지 못하게 되었다. 제작진이 '이때는 이렇게 반응해야 합니다.'라고 알려준 대로 '반응'하는 수동적 시청자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멀쩡한 우리 드라마에 '한국어 자막'이 있는 경우가 더 보기 편한 지경이 되었다. 연기자가 사투리를 쓰거나, 시청자의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아닌데 말이다.

새로운 도구는 편리함을 주지만 이처럼 사람이 갖고 있었던 능력의 퇴화를 가져온다. 전자계산기는 암산 능력을 더디게 만들었고, TV는 사고력과 의사소통능력의 둔화를 가져왔다. 전자계산기나 TV는 이미 새로운 도구도 아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느껴진다. 이제부터 나올 새로운 도구도 사람이 갖고 있던 어떤 능력의 퇴화를 가져올 것이고, 그 결과 뭔가 끔찍한 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몇 년 간의 관찰 결과 사람은 외부 영향에 참으로 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으로 궁금한 것을 바로바로 검색하다 보니 뭔가를 스스로 알아보거나 남들이 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인터넷 망 속도가 조금만 느려도 짜증을 낸다. 카카오톡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메신저가 생긴 이후 말로 소통하지 않고 문자를 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화 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보험 권유'나 '상품 판매'를 하는 경우가 통화를 요구하는 수신전화의 대부분인 날도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학생들은 강의실 안에서의 조별토의에서 마주 보고 앉아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서 채팅으로 대화한다. 유튜브의 평균 영상 재생 시간이 15분이었을 때에는 학생들이 15분이 지나면 한 번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딴짓을 시작했었는데, 최근 영상 재생시간이 10분으로 줄어들자 집중시간은 10분으로 줄어들었고, 숏츠를 자주 보는 학생들은 아예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래서 어쩌라고? 시대가 그렇게 변하면 당연한 것 아니야? 그리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 같이 그러면 별 문제없는 것 아니야? 피할 수 없으면 그대로 살아야지. 받아들여. 인정해.

우리 앞에 나타난 새로운 도구 AI에 대해서도 저렇게 이야기한다. AI가 업무의 효율성을 높인다고들 한다. 그럴 것 같다. 내 뇌는 그보다 빨리 처리하지는 못할 테니까. 기다리는 것이 제일 싫던 이들에게는 정말 박수받을 만한 도구로 다가올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저 별 것 아닌 도구들도 인간의 능력에 변화를 일으켰는데, AI는 어떨까? AI가 가져올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나는 공포스럽기만 하다. 내가 옛날 사람이라서, 내가 AI 개발자와는 거리가 먼 인문학 전공자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라에서는 AI 개발에 전폭적인 투자를 한다고 한다. 우리의 AI를 갖는 것. 그나마 그 와중에 조금 덜 공포스러운 이야기이다.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에게 AI를 활용해서 교육을 하라는 것이 문제이다. AI를 도구로 활용하라는 것 왜 문제인가?

'업무'를 보는 사람은 이미 '학습'을 마친 상태에서 도구를 활용한다. 그러니까 원래 그 일의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전자계산기를 사용하든, AI를 사용하든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정말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학습자는, 학생은 일의 진행을 모른다. 몰라서 배우는 단계이다. 이때 그 단계를 건너뛰는 AI를 활용하면 영원히 그 지점은 알 수 없는 상태로 살게 된다. 쉽게 갈 수 있는 길, AI 이용의 유혹은 하위권 학생에게는 매우 매력적이다. 별로 뭔가를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오니까 말이다. 원래 대로라면 1주일 동안 머리를 싸매고 쓰려고 해도 점수가 잘 나오지 않을 법한 리포트만 쓰던 내가 술술 읽히는 리포트를 낼 수 있게 되는 경험. 놀랍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긴 글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니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 같은 행위는 전혀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AI 없이는 '바보'인 인류의 등장이다.

누구도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본인이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 않는 것처럼 정전이나 통신망이 끊어지는 것 같은 것도 잘 상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때는 어떻게 하려고.


다음에는 '기존에 나와있는 AI를 이용해서 교육하라'는 지침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