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월요일, 글쓰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기상 악화로 갑자기 파투가 났다. 눈이 많이 내렸다.
집 근처 무인 카페에 가서 <한국 베스트 단편소설>을 읽을 계획을 세우고 집을 나섰다.하루 종일 춥다고 움츠리고 다녔는데, 벨벳 치마에 털모자까지 쓰니 몸이 따뜻해져서 씩씩하게 걸었다.
그 무인카페에는 늘 책이 여러 권 비치되어 있다. 전에는 못 보던 책이 눈에 띄었다. 두 글자의 한자로 된 제목이 눈에 띄었다. 공주? 내가 맞게 읽은 것 맞지?
나태주 님의 <공주>라는 책이었다. 나태주 님의 시를 몇 개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시는 아니라고 느꼈기에 그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시인들의 산문에는 관심이 있다. 언어의 마술사들이 써내는 논리적인 긴 문장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에. 시, 아름답다. 하지만 가끔 어떤 시에는 속임수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시인이 쓴 산문이 그저 그럴 때는 시가 덜 진실하게 느껴지고, 그의 시는 그저 순간의 감상주의를 감싼 기교와 말장난에 불과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안미옥 시인, 그녀의 시집을 열심히 읽다가 우연히 그녀의 산문집을 보게 되었는데, 파스스, 그녀를 향해 가졌던 열렬한 마음의 한편이 무너져버렸다. 그런 경우도 있다. 이제니 시인의 경우는 반대인데, 원래도 그녀의 팬이었지만 그녀의 산문을 읽고 더 좋아져 버렸다. 그런 경우도 있다.
아무튼, 아무튼.
그래서 시인들이 쓴 산문이 궁금하기에 나태주 님의 산문집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는 스토리.
나태주 님의 글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를 아프게 했다.
그가 공주사대 출신인 건 알고 있었다. 서천 사람인 나태주 님에게 공주는 큰 도시였다. 그는 어려서 시인이 되겠노라, 그리고 크고 아름다운 도시 공주에 가서 살겠노라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을 다 이루었다.
가난하고 성실한 고교 교사, 그리고 시인. 그는 셋방 살이를 전전하다 처음으로 자기 집을 가지게 되고 그 집을 지극히 사랑한다. 책 곳곳에 그 집에 대한, 아내에 대한, 그리고 공주의 구석구석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묻어있다. 가난한 살림에 두 자식들에게 켄터키 프라이드치킨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하고 키운 아버지의 애끓는 부정. 남편과 두 자식만으로 자신의 세계를 가득 채운 소박하고 진실한 아내에 대한 사랑. 가난한 그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갔는지 구구절절하고 솔직한 이야기들이 책에 담겨 있다. 성실하고 정직한 그의 산문은 그의 시를 닮아 있었다.
그의 삶의 궤적은 나의 아버지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공주보다 남쪽 태생인 것도. 공주 사대를 졸업해서 교편을 잡으신 것도. 내 아버지도 생애 첫 집을 사시고 많이 행복해하셨었다고 한다. 나태주 시인님이 자기가 살던 집을 펜으로 간략히 그려놓은 그림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그림과 많이 닮았다. 울 아빠도 가는 펜으로 그렇게 정교한 그림을 잘 그리시는데. 그가 낡은 집을 싸게 사서 고쳐 살았듯이,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아버지와 나태주님의 포개져있던 삶은 어느 순간 갈린다. 나태주 님은 사고를 당하지 않았고, 내 아버지는 삼십 대 초반 사고를 당해 다시는 걷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공주를 떠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사랑하는 누이들이 살던 공주를 떠나 수원에 정착해야 했다. 수술을 여러 차례, 그리고 기약 없는 재활을 해야 했기에, 좋은 대학병원들에서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아버지에게 일어난 불행은 내게 얼마만큼의 상처를 남긴 것일까. 나는 매주 교회를 나가면서도 아버지를 다치게 한 하나님께 여전히 화가 나있다. 아버지 역시 하나님께 화가 나있는지, 니체 신봉자에 무신론자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나의 분노는 아마 아버지를 뛰어넘을 것이다. 상상력이 좋아서 그런가. 나는 나 자신의 일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더 슬프고, 더 화가 나곤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나는 더 맹렬히 미워하는 편이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싶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정말 힘든데, 그 대상이 절대자일 때는 오죽할까.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에 꽁한 것이 풀리지 않는 느낌이다.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아버지가 살 수도 있었던 삶을, 나태주 님의 책을 읽으며 내내 마음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욕을 중얼거리면서. 씨발, 좆같네.
나는 멀쩡하게 아름다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슬프고 화를 냈다. 아버지의 운명에. 아버지를 그리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그리고 항상 선한 것을 계획하시는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는 바보 같은 나 자신에게.
그러나, 삶은 행복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삶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가야 하는 길도 가야 했던 길도 없다.
그냥 내가 지금 걷게 된 길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 몫의 슬픔은 아버지에게 남겨 두고
이제는 내 몫의 삶을 애도하며 걸어가야 한다.
새해에는, 부모에게 떨어져 나와,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름다운 책을 아름답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