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Monster), 2023
좋은 엄마란 무엇일까. <괴물>에서의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좋은 엄마에 가깝다.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면서도 미나토가 불안함을 느끼지 않게 농담을 던져가며 아들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1부에서 보이는 미나토의 행동은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해 보인다. 갑자기 혼자서 머리를 잘라버리는가 하면 학교에서 가지고 온 보온병 안에는 흙이 들어가 있고 신고 돌아온 운동화는 한 짝이 없다.
그리고 어느 날 미나토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 사오리는 이미 남편을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사오리는 정신없이 운전해 미나토를 찾는다. 다행히 미나토의 흔적을 따라 그를 찾아낸 사오리는 감정을 추스르며 미나토를 집으로 데리고 간다. 미나토는 계속해서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고 급기야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한다. 미나토는 왜 그러는 것일까.
평정심을 유지하던 사오리는 “내 뇌는 돼지 뇌랑 뒤바뀐 거라고”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미나토에게 간절하게 묻는다. 도대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누구냐고. 미나토의 입에서는 가까스로 ‘호리 선생(나가야마 에이타)’이라는 대답이 나온다. 영화의 초반 불이 난 건물을 바라보며 미나토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이 물음 역시 호리 선생의 말이라고 했다.
사오리는 진실을 알기 위해 학교를 찾는다. 하지만 교장과 그 외 교사들은 기계적이고 판에 박힌 사과만을 한다. 특히 이 모든 것이 ‘오해’라는 말은 사오리를 더 분노하게 만든다. 관객 역시 이 시점에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학교와 교사에게서 ‘괴물’의 형상을 본다. 호리는 사오리에게 미나토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란 친구를 괴롭힌다는 말을 하고 ‘괴물 찾기’에 골몰하던 관객은 긴장하게 된다. 혹시나 하는 걱정으로 요리를 찾아간 사오리는 둘이 친구란 말에 안도하며 호리가 항상 미나토를 때리곤 한다는 원하는 답을 듣게 된다.
호리가 미나토를 괴롭혔다는 요리의 증언으로 이제 비난할 타겟은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2부는 호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영화의 시작은 불타는 건물로 동일한 시점으로 시작한다. 호리는 연인과 함께 그 건물 근처를 지나고 있다. 마침 그 길로 호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지나가고 아이들은 호리가 걸스바에서 나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그 길을 지나간다. 여기서 관객은 걸스바에 다닌다는 말이 그저 소문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오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1부와 같은 질문을 해보자. 좋은 교사란 무엇일까. 호리는 학교에 갓 부임한 평범한 교사이다. 밤늦게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걱정하고 유쾌하고 다정하게 아이들을 대한다. 대다수의 아이에게는 좋은 교사일 것 같다. 무엇보다 ‘돼지 뇌’와 같은 말로 아이들을 가스라이팅 하는 폭력 교사와는 거리가 멀다. 체벌 교사로 낙인이 찍힌 호리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기자는 말도 없이 찾아와 사진을 찍어 가고 사랑했던 연인은 떠나고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
이제 ‘괴물 찾기’는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간다. 요리가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미나토에게, 그리고 다시 속을 알 수 없는 요리에게. 미나토는 대체 왜 거짓말을 했을까.
3부에 와서의 그 모든 의뭉스러운 행동들의 실마리가 풀리며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오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오해는 한 사람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걸스바에 출입하는 난잡한 교사로, 아이를 과하게 보호하는 편모 가정으로 모두가 서로를 불신하며 오해하는 과정 속에서 어른들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 속에서 현명한 아이들은 위험한 진실을 말하고 안전한 거짓말을 한다.
아이들이 현명하단 이유는 아이들이 놓인 자리가 너무도 취약했기 때문이다. 사오리는 좋은 엄마였지만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미나토는 친부가 불륜 중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엄마가 만들어 놓은 좋은 아빠라는 허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평범한 가정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엄마에게 미나토는 결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뇌가 돼지 뇌일지도 모른다는 자조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의심에서 기인한다. 본인도 자기 안에서 자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사오리는 간곡하게 진실을 요구한다. 어린 미나토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요리의 세계는 더욱더 가혹하다. 친부는 요리가 ‘병’에 걸렸다고 말하며 요리를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학대한다. 요리는 자신이 잘못된 아이라는 걸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학교 역시 요리에겐 만만치 않은 공간이다. 요리의 ‘병’이 무엇인지 아는 남자 아이들은 요리를 괴롭힌다. 요리와 놀아주는 친구는 여자 아이들 뿐이다. 호리는 요리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넘어진 요리를 일으켜주고 화장실에 갇힌 요리를 꺼내주긴 하지만 호리는 말로만 걱정할 뿐이다.
미나토는 요리가 겪어내고 있는 그 세계가 무섭다. 요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지만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도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공존한다. 미나토는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요리를 밀어낸다. 요리는 그러한 거리두기를 수긍한다. 이미 많이 겪어봤다는 듯이 익숙하게 웃는다.
아이들은 그래서 버려진 세계로 간다. 둘은 버려진 기차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그린다. ‘괴물은 누구게’라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사실 누구를 괴롭히기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괴물’이 될 수 있는 세계에서 평등해진 ‘나’를 부른다. 지극히도 평범한 아이들이 다른 세계로 숨어들어가 새로 태어나길 꿈꾸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평범하지 않다고 규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거센 폭풍의 밤이 지나고 미나토와 요리는 자유롭게 기찻길을 뛰논다. 막혀 있던 기찻길은 건너갈 수 있도록 뚫려 있다. 이것은 환상일까. 현실일까.
3부의 마지막에서 사오리와 호리는 기차를 발견하고 흙탕물로 안이 보이지 않는 창문을 아래에 두고 아이들을 부른다. 손으로 계속 창문을 닦아 보지만 금세 흙탕물로 뒤덮인다. 그렇게 끝났다면 이 영화는 비극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정상적인 통로가 아닌 문을 마침내 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환상과 같은 장면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아이들의 꿈이라고 생각했다. 미나토가 비로소 웃으면서 일어날 수 있는 행복한 꿈. 실수하고 오해하는 어른들이 그래도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으로 이끌어 줄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희망을 보았다.
“애들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는 관객이 있을 것이라는 건 이미 알고 찍기는 했습니다. 돌려서 말하고자 하면 촬영 중 엔딩 신을 찍기 전에 ‘미나토’ 역을 맡은 쿠로카와가 나에게 편지를 줬어요. 꿈을 꿨다고 하더군요. ‘그 장면 이후 둘이 죽는 꿈을 꿨다’라고 써 있었죠. 그 결말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줬어요. 두 소년이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살면 된다’라고 긍정하는 의미의 결말이라고 아역들에게 말했죠. 그러니까 너희가 이 결말 부분을 연기할 때는 더 많이 기뻐하고 여태 내지 않았던 큰소리를 내도 된다라고 어드바이스를 한 뒤 촬영했어요. 다만 그 결말에 대해 그들이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었다는 것을 과연 우리 어른들이 축복해도 되는 일인지 축복할 권리가 있는 것인지 즉 세상이 변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괜찮은 걸까? 라는 질문은 남기고 싶었습니다.”
감독의 인터뷰를 참고하면 감독이 중점을 둔 건 두 소년의 생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삶 이후이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보여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