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시험에 떨어졌다.
그렇다. 졸업시험에서 떨어졌다. 사실 떨어졌다는 말을 쓰는 것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졸업시험 한 과목을 아예 응시하지 못했기에 과락이 났다. 당연하게도.
전국의 로스쿨 3학년생들은 6월, 8월, 10월에 전과목 모의고사를 치룬다. 그리고 그것으로 로스쿨 졸업시험을 갈음한다. 각 학교마다 요구하는 최소 점수나 기준은 다르다. 우리 학교는 점수가 높은 두 시험의 평균이 일정 점수를 넘어야 졸업시험 통과라는 결과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졸업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졸업예정자 자격을 갖출 수 없어 그 회차의 변호사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다.
그런데 6월과 8월. 나는 그 두 번의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렸다. 6월 모의고사 때는 시험 당일 아침 공황발작으로 첫 날 시험을 치러 가지 못했고, 그래서 8월 모의고사 때는 엄마가 자취방으로 와서 같이 자고 깨워주기까지 했는데 같은 증세로 시험을 응시하러 가지 못했다.
변호사시험이 수기에서 CBT로 바뀌면서 당일 시험에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다음날 시험에는 로그인을 할 수 없는 형식이 되었다. 나는 첫 날 시험을 보러가지 못했기에 그 뒤 모든 과목에 대한 부분응시 기회를 날려버렸다. 물론 행정실에 요청하면 대신 로그인을 해주셔서 부분응시가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난 첫 날 공법 시험에 응시할 생각이었고, 그것부터 어긋나니 뒷 시험을 치지 못했을 뿐.
10월 모의고사는 그래도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았다. 몸도 마음도 회복세였고 애인의 도움으로 첫 날 시험도 잘 응시하고 왔다. 휴식일 후 민법 선택형, 기록형 시험도 치뤘고 마지막 민법 사례형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마지막 날. 내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
전날부터 짐작하긴 했다. 내가 모의고사 기간동안 너무 많이 지쳤고 어쩌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등교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고 오후 1시에나 잠에서 깬 나는 눈을 뜨자마자 엉엉 울었다. 시험기간 내내 내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한 애인, 타지에서 내가 시험을 잘 치러 갔나 함께 마음 졸였을 부모님, 시험 잘 치고 오라며 할 수 있다며 날 응원해주었던 친구들. 그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혼자 누워있는 순간에도 낯부끄러웠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고작 아침잠 하나 이겨내질 못해서 내내 잘 친 시험을 마지막날 망쳐버린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데 나는 화살이 안으로 굽었다. 모든 것이 내가 못난 탓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어영부영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행정실에서 메일이 왔다. 민법 과목 과락으로 졸업시험을 '유감스럽게도' 통과하지 못했다고.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오늘 지도교수님으로부터도 메일 답장이 왔다. 이번 졸업은 힘들겠다고.
10월 모의고사 성적도 공개되었다. 응시한 공법은 졸업시험 통과 기준을 쉽게 넘겼고, 응시한 민법 선택형과 기록형 점수도 내 기준에서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 날 시험을 보러 가지 못한 것이, 어쩌면 보러가지 않은 것이. 더욱 뼈아팠다. 눈물이 조금 났다.
꾸역꾸역 점심을 먹고 도피성으로 잠을 잤다. 긴 낮잠의 중간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졸업시험에 떨어져서 이번 변호사 시험을 치루지 못하게 되었다고, 내년에도 학교에 적을 두려면 100만원이 넘는 연구등록비를 납부해야한다고,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가 져서 밖이 이미 깜깜해졌을 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우선 샤워를 하고 손톱을 깎았다. 정말 우울은 수용성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무래도 내 목소리에 힘이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이번에 졸업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모두들 괜찮다고 말해준다. 1년 늦어지는 거 인생 전체로 보면 그렇게 큰 일 아니라고. 백 얼마의 돈이 네가 변호사 일 시작하면 별 거 아닌 돈이 될 거라고. 어차피 이번 시험에 응시한다고 해도 합격권의 점수는 힘들었을 테니 사실 변한 건 크게 없다고.
그래서 나도 괜찮아보려고 한다. 이번 변호사시험에 응시하지는 못하지만 듣던 파이널 강의를 다 듣고, 공부를 하고, 나를 달래고 얼러보려고 한다. 정말 내 인생의 이 페이지가 언젠가 웃음 지으며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일은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힘차게 살아보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나도 정말 괜찮아지는 순간이 올 것도 같아서.
언젠가는 '이제는 괜찮은 이야기'가 될 '지금의 안 괜찮은 이야기'를 나는 계속 써내려간다. 시간은 흐르고 상처가 남았을지언정 나는 성장했을 테니. 내 마음의 생채기들이 언젠간 굳은 살이 되어 나를 단단히 지켜주기를 바란다.
+) 제가 오래 글을 올리지 않으면 종종 댓글로 안부를 물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아마 얼굴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도 마음을 써주실 만큼 따뜻한 분들이시겠죠. 언젠가 모두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날까지 이야기를 전할게요.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괜찮아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