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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의 낡은 건물 입구에 '변호사 강지상 법률사무소'라는 목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런 지저분한 곳에 변호사가 있다니...'
연우는 실망감을 감추며 계단을 올라갔다.
상아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신문지로 얼굴을 덮은 채 소파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는 중국집 빈 그릇이 쌓여 있었다. 인기척에 깬 지상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예전의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거의 폐인처럼 보였다.
“어? 네가 여기 웬일이냐?”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보시다시피, 내 꼴이 이래. 패소 변호사로 소문이 나서 소송 의뢰가 없어. 만날 뭐 믿어라, 어디에 가입하라는 족속들만 찾아와.”
“그럼 어떻게 지내세요?”
“가끔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돼서 밥은 굶지 않아. 그런데 손님이 오셨는데, 뭐 마실 게 있나?”
지상이 냉장고 문을 열자, 소주병들이 떨어져 와장창 깨졌다. 연우는 재빠르게 달려가 바닥을 치웠다.
“이분은 누구셔?”
“친구의 동생이에요.”
“설 상아라고 합니다.”
“근데 무슨 일로?”
연우는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자, 지상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목격자들이 상태라는 친구가 운전했다고 하니 무죄는 힘들 것 같아.”
“저의 오빠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에요!”
“거짓말이 아니라 기억이 없는 거겠죠.”
상아의 강한 반박에 지상은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고함쳤다.
“그러니까 도와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저, 싸가지 여전하군. 여전해.”
지상을 쏘아붙이던 수진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상아 씨가 여기는 웬일이야?”
“어! 하 변호사님 아니세요? 오빠 사건으로 왔어요.”
상아는 눈짓으로 지상을 가리키며 ‘이 변호사는 아니다’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 변은 어쩐 일로 행차하셨나?”
“내가 이 사건에 국선 변호인으로 선정되었어. 근데 나는 교통사고를 처리한 경험이 없잖아. 선배님, 도와주실 거죠? 믿어용~"
수진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후배에게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황상 무죄가 될 가능성은 없어. 포기해.”
“난 포기하지 않아! 글구 포기라는 말은 배추를 셀 때나 쓰는 거 아니야?”
“패소할 소송에 변호인이 많다고 이기겠냐? 형량을 줄일 방법이나 찾아봐.”
“내가 조사한 결과, 의뢰인은 무죄야.”
“뭘 조사했는데? 교통사고를 다룬 적도 없잖아?”
“그건 맞지만….”
꽁지를 내리던 수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의뢰인은 억울하다고 주장하고 있어!”
지상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의뢰인이 변호인을 속이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야?.”
“강 선배, 이 사건에 누가 개입된 줄 알아?”
“그걸 알아선 뭐해? 패소할 재판인데.”
“태,양,로,펌.”
“뭐? 태양이라고? 음….”
화들짝 놀란 지상은 신음하고 곧 반색했다.
“넌, 내가 태양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 줄 알았냐? 태양은 국내 최고의 로펌이야. 싸움도 상대를 보고 해야지, 설익은 정의감으로 덤비는 건 아니야.”
“설익든 익었든 사과는 사과지. 설익었다고 사과가 배로 변하지는 않잖아?”
“너 혼자 이렇게 뛰어다닌다고 상황이 바뀔 것 같아?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어. 세상은 본래 그런 거야.”
“그럼 달라질 게 없다고 뛰지도 말라는 거야?”
수진의 반발에 그는 뭔가 짚이는 듯 중얼거렸다.
“태양이 관여했다면 이번에도 증인들을….”
“당연하지. 그래서 내가 국민참여재판이 유리할 것 같아 신청했어.”
“그건 잘했네.”
“그렇죠! 잘했죠!”
오랜만에 칭찬받은 수진은 신났다.
지상이 진지하게 말했다.
“국민참여재판에서는 배심원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해. 재판부보다 배심원을 설득해야 하니 더 힘들 수도 있어. 게다가 유죄 판결이 나면 형량이 더 무거워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해. 다행히도 국민참여재판의 무죄율이 약 10%로, 일반 형사재판의 4%보다 높아서 유리할 수도 있지.”
“태양은 승소를 위해 별짓을 다 하는 집단이잖아. 강 선배, 일단 의뢰인을 한번 만나나 봐. 응?"
“저는 상태를 잘 알아요. 뭔가 잘못된 것이 확실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선배님.”
연우의 간절한 매달림에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럼 의뢰인을 만나보고 피박을 쓸지 말지 결정하지.”
“선배님, 정말 고마워요.”
“아직 그 인사를 받기에는 일러.”
“그래도 시동은 걸었잖아요.”
연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이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 후보자로 선정됐다는 통지를 받았어요.”
“그래? 무작위로 뽑히는 거라 로또처럼 당첨되기 힘든데, 우연치곤 대단하네. 정식 배심원으로 선정될지는 모르겠지만.”
지상이 당부하듯 주지시켰다.
“연우야, 만약 배심원으로 선정되더라도 너와 의뢰인의 관계가 드러나면 검찰 측에서 기피 신청을 할 수 있으니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해. 그리고 네가 배심원 후보자라는 사실도 여기 있는 세 사람 외에는 말하지 마.”
“알겠어요.”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검색했던 연우는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난 의뢰인에게 접견을 가야겠네. 하 변은?”
“나는 재판이 있어서.”
“저도 함께 갈래요.”
“너는 안 돼. 면회 신청서에 기록이 남으면 의뢰인과의 관련이 드러날 수 있어.”
“앗, 맞다. 그냥 따라만 갈게요.”
“저도요.”
상아도 가겠다고 말했다. 사실 연우는 과거의 사건 때문에 그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변호인 접견실로 수인복에 1355 수번이 붙은 상태가 힘없이 들어왔다. 다소 왜소한 체격에 하얀 피부와 처진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강지상 변호사입니다. 동생이 설상아 씨죠? 그분의 의뢰로 왔습니다.”
“저는 변호인이 있는데요…?”
“변호인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상태 씨, 거짓말이라는 날개는 당신이 숨고 싶은 곳 어디든 데려다 줄 수 있지만, 돌아오는 길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사실을 말해 주시겠어요?”
“변호사님, 저를 정말 믿으세요?”
“대부분의 의뢰인들이 그런 말을 하곤 하는데,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에요. 저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만 변론할 것입니다.”
“...”
“상태 씨, 저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괜찮습니다. 변호사법에 따르면 변호인은 의뢰인의 비밀을 지켜야 하고, 의뢰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수 없으니까요.”
“네.”
“궁금한 점이 많지만 하나씩 물어보죠. 사고 당시 술을 마시고 운전했다고 하던데요?”
“양주 3잔을 마셨어요. 원래 체질상 알코올 분해 효소가 부족해 술을 잘 못해요.”
“사고 당일의 상황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도진이 전화 받고 술집에 도착했을 때 친구들은 많이 취해 있었어요.”
“계속 말해 보세요.”
상태는 힘든 표정으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야! 나야. 바로 튀어와!”
“어. 나 자려고 하는데….”
“너 미친 거 아냐? 야, 나라고. 도진이라고!”
“그…. 그래, 갈게.”
상태는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토로했다.
“나는 쇠사슬에 끌려가는 노예와 다름없어.”
“왜 이렇게 늦었냐!”
도진이 타박했다.
“차, 차가 밀려서.”
“상태구나.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준영과 영채가 상태를 보고 반가워했다. 두 사람도 초등학교 동창이라 서로 알고 있었다.
“도진이 유학 마친 기념으로 모인 거야. 너도 한잔할래?”
“아, 아니. 나 술 못하잖아.”
“야, 마셔! 분위기 깨지 말고.”
도진은 준영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상태의 잔에 부었다. 이어 술잔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우리의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건배! 야, 빨리 마시라니까!”
도진의 강요에 상태는 잔을 비우고 독한 술맛에 혀가 아렸다. 연이은 윽박에 2잔을 더 마셨다. 그러다 도진이 불쑥 말했다.
“우리 속초로 바닷바람을 쐬러 갈까?”
“좋지.”
“나도 좋아.”
친구들은 찬성했지만 상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운전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 나가자.”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나도.”
준영과 영채가 일어나자 두 사람은 술집을 나섰다. 주점 앞에는 슈퍼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도진이 차 키를 상태에게 던졌다.
“네가 운전해.”
“내가? 안 돼. 나 술 마셨잖아.”
“뭐? 지금 나한테 개기냐? 몇 잔이나 마셨다고. 글구 네가 평생 이런 고급차를 운전해 볼 기회가 있겠냐? 가문의 영광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아니, 술도 마셨고, 길도 모르고….”
“닥치고 운전해! 평소에 잘하던 새끼가 왜 빼고 지랄이야!”
도진은 그의 멱살을 잡고 칠 듯한 기세였다.
“아, 알겠어.”
결국 상태는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조수석에는 도진이, 뒷좌석에는 준영과 영채가 잠들어 있었다. 차는 어두운 국도를 달렸다. 한참 후, 잠에서 깬 도진이 버럭 소리쳤다.
“야! 아직도 멀었냐?”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아.”
“이래서 언제 도착하냐? 지금부터 내가 운전할 테니 차 세워!”
상태는 조수석으로 가다가 무심코 정면에 있는 ‘속초 10km’ 도로 표지판을 보았다.
“기억을 잘 더듬어 보세요. 그 외에는 없나요?”
“네. 처음에 제가 운전한 건 맞아요. 하지만 속초에 가까워지면서 도진이와 교대를 했어요. 그런데 사고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운전석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변호사님, 저는 도진이와 자리를 바꾸면서 ‘속초 10km’ 도로 표지판을 똑똑히 봤어요.”
“교통 표지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렇다면 교대 지점에서 사고 지점까지 가는 동안 맞은편 차들은 있었나요?”
“왜 그런 질문을 하시죠?”
“그 차들의 블랙박스를 확인하면 운전자를 알 수 있거든요.”
“없었어요.”
상태는 울먹이며 말했다.
“진짜 저는 사고를 내지 않았어요. 제발 믿어 주세요. 전 너무 억울해서 죽고 싶어요.”
지상은 접견실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분명히 뭔가가 있어… 몇 분! 그 시간 속에 진실이 숨어 있는 거야. 비록 짧은 검사 시절이었지만, 나는 많은 범죄자들을 조사했어. 그래서 촉이 있지. 거짓말이란 눈덩이와 같아 구르면 구를수록 점점 커지게 마련이야. 그런데 상태의 진술은 믿을 만해. 그렇다면 누명을 쓰고 있다는 건데… 하지만 상대방은 우리나라 경제를 좌우하는 대기업의 후계자야. 게다가 그를 변호하는 쪽은 최고의 로펌이잖아.”
지상은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려웠다.
구치소 마당에서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땅 위를 이리저리 굴렀다. 지상은 그 낙엽이 지금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느꼈다.
‘여기서 도망친다면 나는 또 사람을 죽이는 셈이야. 그러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거야….’
그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상태의 절규가 귓전을 때렸다.
“저는 어쩔 수 없이 갈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본시 그렇게 살아왔어요. 양반과 머슴으로요. 전 너무 억울해서 죽고 싶어요.”
지상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연민이 솟구쳤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진실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 거짓은 세상을 반 바퀴 돌 수 있다.’
결국 그는 이 재판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