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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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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연우는 도원그룹 입사 시험에 떨어져 취업 준생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자존심이 상한 그는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독립은커녕 부모님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날도 연우는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벽에는 ‘도원 합격까지 나의 하루하루는 죽었다’라는 결의에 찬 문구가 붙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 무슨 일이세요?”

“공부하느라 힘들지? 오늘 생활비랑 네가 좋아하는 옥수수 보냈어.”

“고마워요. 아버지는요?”

“비닐하우스에 가셨어.”

“평생 공직에 계셨던 분이 일은 힘들지 않으세요?”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 조만간 도희랑 집에 내려오렴.”

“네. 작년에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장원급제해서 금의환향할 테니 미리 돼지 잡아 놓으세요.”

“우리 연우, 여전히 허풍이네. 그래도 건강은 꼭 챙기렴.”

“그럴게요.”

“등기요!”

전화를 끊자마자 집배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받은 등기 봉투에는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안내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내용을 살펴보는 그의 표정은 기쁨과 걱정이 뒤섞였다.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하면 과태료가 200만 원 이하라고? 그리고 배심원으로 선정되면 하루에 12만 원, 탈락해도 6만 원을 준다니 일당치고 꽤 짭짤한데?”

연우는 매스컴에서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그 용어를 입력하자 관련된 블로그들이 많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2008년부터 국민참여재판이 시행되었구나. 만 20세 이상의 국민 중에서 무작위로 배심원을 선정하고 형사재판에 출석해서….”

그는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불출석할 이유가 딱히 없었고, 이 재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문서를 작성하던 중 연우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 상, 태.’

피고인의 이름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친구들과의 통화를 마친 후 중얼거렸다.

“하긴, 상태와 만나는 친구가 있을 리 없지.”

그때 휴대폰이 울리자, 연우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지금 재판받고 있는 피고인이, 우리 동창 그 설사똥이 맞다고!”

그는 여러 친구를 통해 가까스로 상태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두 사람의 거주지 관할 법원이 같아서 연우에게 등기가 온 것이었다.

“요즘 원수는 맛집에서 만난다고 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다니… 이게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르겠네.”

사실 그는 아픈 기억을 넘어서 상태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빚이 있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갔다. 건너편에는 중학교 전경이 펼쳐졌다. 운동장 곳곳의 은사시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나부끼며 은빛을 발산했다.

어느 교실에서 장난치는 학생들의 모습과 과거의 악몽이 겹쳐졌다.

그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쉬는 시간, 3-2반 교실은 시끌벅적했다. 이때 한 친구가 문을 열며 소리쳤다.

“히틀러가 소지품 검사를 한대!”

모두는 후다닥 자리로 돌아가느라 소란스러웠다. 그 순간 연우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옆자리 상태는 다행히도 아직 입실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상태의 가방에 술병과 담뱃갑을 옮겨 넣었다. 이어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집에서 자신의 생일파티를 열었고, 부모님은 여행 중이었다.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친구들이 축하와 함께 선물을 주었다. 분위기는 매우 즐거웠다. 그때 영필이가 가방에서 술과 담배를 꺼내 연우에게 권했다. 그는 거절했지만,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피우고 마시기 시작했다.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이게 최고야!”

“연우야, 너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어. 그렇지?”

“맞아!”

“그래!”

“아니야. 나도 할 수 있어!”

친구들의 놀림에 연우는 갑자기 객기가 솟구쳤다. 담배 연기에 캑캑거리며 술기운에 몽롱했지만,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 후로는 필름이 끊겼다.


늦잠을 잔 연우는 탁자 위에 놓인 술병과 담뱃갑을 가방에 쓸어 담고 학교로 내달렸다. 정문을 빠르게 통과한 후, 지각을 면한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가방 속의 물건이 번쩍 떠올랐다.

“오다가 버리려던 걸 깜빡했네. 이걸 어떻게 하지….”

만약 이것이 발각된다면,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혀 반장인 연우에게는 치명적이다. 당시 상태는 늘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미미한 존재였다. 게다가 성적도 바닥이라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지만, 마음이 여린 그는 순응하며 지냈다.

드디어 소지품 검사가 시작되었고, 상태의 가방에서 술병과 담뱃갑이 나왔다.

“이 자식, 공부도 못하면서 술, 담배까지 해!”

“인마, 교복 좀 빨아 입어라. 홀아비 자식처럼 티 내냐!”

악명이 높아 ‘히틀러’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부장과 담임은 번갈아가며 그의 뺨을 후려쳤다.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 몰라요.”

부인하는 그의 말은 변명으로 여겨져 더 큰 매를 맞았다.

“와! 설사똥 대단하네?”

“저거 정말 엉큼한 놈이야.”

친구들의 조롱 속에서 연우는 애써 외면하며 시치미를 뗐다. 다음 날, 허름한 복장을 한 상태의 아버지가 담임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이후 친구들 사이에 이런 소문이 퍼졌다.

“상태 아버지가 절름발이래.”

“별명이 또 생겼다며? 설내숭이래.”

이 사건은 10일 정학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그 기간이 지나도 상태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 연우는 죄책감에 괴로웠으나, 사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고 진실은 묻혀버렸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갔다. 단, 연우만 제외하고.


그가 고3이 되었을 때, 여동생의 손을 잡고 있는 상태와 길에서 마주쳤다. 그는 기름때로 얼룩진 작업복에 머리는 장발이었다.

“어, 연우구나. 반가워!”

상태는 아는 체를 했지만, 연우는 과거의 죄의식 때문에 못 들은 척 지나쳤다. 그 후, 상태에게 두 번이나 상처를 준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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