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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소리쳤다.
“강 선배! 재판부가 형사 5부로 변경됐어!”
“뭐라고? 5부 재판장은 심재평 판사인데…”
지상은 누군가와 통화한 후 말했다.
“심 판사는 원래 검사였다가 판사로 전직한 분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문제는 태양 대표인 윤철 변호사가 부장검사였을 때 그 밑에서 일했었다는 거야."
“검사동일체 원칙의 상명하복? 이제 윤곽이 드러나네.”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검사가 검찰권을 행사할 때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상관의 명령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검찰청법의 규정이다. 반면,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독립적으로 심판하며 대법원장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이건 법원의 고유 권한이야. 우리가 간섭할 사항이 아니야.”
“판사 기피 신청은 어떨까?”
“재판장이 피고인이나 피해자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기피 사유가 되지 않아.”
“듣고 보니 그렇네.”
“핵심은 재판부가 왜 돌연 변경됐냐는 거야.”
“혹시 배심원들을….”
연우의 의구심에 지상이 무릎을 '탁' 쳤다.
“따봉! 국민참여재판의 중심은 배심원이야. 일반인인 배심원들은 법정의 엄숙한 분위기와 재판부의 권위에 위축될 수밖에 없어. 재판장이 주도권을 쥐고 재판을 좌지우지하려는 의도인 것 같아.”
“선배, 또 놀랄 게 있어.”
“뭔데?”
“이 사건의 수사 검사가 공판까지 맡는다는 거야. 이건 드문 일이잖아? 갑자기 재판부가 바뀌고… 구린내가 심하게 나지 않아?”
“하지만 피고인과 치열하게 다투는 직관 사건의 경우, 수사 검사가 공판도 할 수 있어. 그럼 고 검사가 공판까지 맡는다는 거야!”
“이제야 쇼크가 오나 보네. 왜? 수석과 싸우려니 쫄려?”
수진이 약을 올렸다. 사법연수원 후배인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아! 선배는 고 검사에게 징크스가 있지?”
“뭘, 모르네. 징크스는 깨라고 있는 거야. 글구 성적과 법정 다툼은 전혀 다른 문제지. 네 말대로라면 대통령도 시험으로 뽑아야겠네.”
“하여간 내가 무슨 말을 못 하겠어. 강 선배는 화장터에서 입만은 안 탈 거야.”
모두가 웃었다.
솔직히 지상은 석낙과의 공방을 피하고 싶었다. 연수원 시절 모의 법정에서 자주 패했기 때문이다.
“이 재판은 가시밭길이 될 거예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요.”
그때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뻬꼼 얼굴을 내밀었다.
“어, 문 수석? 네가 웬일이야?”
“혹시 도와드릴 게 있을까 해서요.”
“그러면 나야 너무 고맙지.”
“수석은 무슨? 돌 수석 주제에. 쟤는 왜 여기에 끼워요?”
수진이 무시하는 투로 쇳소리를 냈다.
“왜? 제 발로 찾아온 고마운 사람에게.”
“헤헤…. 고맙긴요. 저야말로 예전의 신세를 꼭 갚으려고 했는데요.”
“신세라니? 무슨 얘기야?”
“아, 별거 아니야.”
“별것 아니라니? 말해 봐!”
지상이 손을 내젓자, 수진은 세호를 재촉했다.
“부끄럽지만 제가 검사 시보 시절에 큰 실수를 했거든요. 그때 강 검사님께서 잘 수습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 고마움을 늘 잊지 않고 있었죠. 그러다 우연히 소송 소식을 듣고 도와드릴 게 있을까 해서 왔어요.”
“우연은 무슨? 서초동 바닥에 소문이 쫙 퍼졌는데.”
“정말이야?”
“모르셨어요? 지금 법조계 최대 이슈예요. 개인 변호사 대 초대형 로펌의 싸움이라고.”
“또 정의의 미녀 변호사와 불법에 찌든 로펌 간의 박빙 승부라고도 하지.”
수진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는 세호에게 물었다.
“근데 왜 변호사 개업을 안 해? 너, 최연소 변호사 취득자 아니야? 21살 때 회계사 자격증도 땄다며?”
연우와 상아는 감탄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많이 부족해서요. 더 실력을 쌓아서 강 변호사님처럼 훌륭한 법조인이 돼야죠.”
“그래그래.”
지상은 우쭐댔다.
“여기는 내 후배이고, 저분은 의뢰인의 동생이셔.”
“최연우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별 말씀을요.”
세호는 연우와 악수하며 상아와는 눈인사를 나눴다.
“형사소송법에는 ‘범죄 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어. 즉, 의뢰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정황 증거보다 직접 증거가 더 유리하다는 거지. 그리고…”
설명을 마친 지상이 외쳤다.
“변론 기일까지 최선을 다해 공판 준비를 합시다!”
“근데, 피는 어떻게 나눌 건가요?”
“야! 지금 무고한 사람이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피 얘기가 나와? 속물 같으니라고. 글구 너, 순수하게 도와주러 온 거 아니었어?”
수진은 멸시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엄연히 피 빨아 먹고 사는 직업인데…”
“하 변, 피는 어쩔 건데? 설마 그 얘기를 안 꺼낸 건 아니겠지?”
“그, 그게…”
수진이 머뭇거리자, 상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수임료는 얼마가 되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낼 테니까요.”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 냉랭한 공기를 연우가 깨뜨렸다.
“그런데 블랙박스가 사라진 게 이상하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차가 충돌하면서 그 충격으로 튕겨 나간 게 아닐까요?”
“창문이 열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현장을 잘 살펴보면 발견할 수 있겠네요.”
세호의 추측과 지상의 가능성이 상아의 결론과 합쳐졌다.
“뭐 해! 빨리 찾으러 가야지.”
수진이 화다닥 일어나며 다그쳤다.
“어휴! 저 성질하고는.”
“선배님, 하 변호사님은 원래 다혈질이에요?”
“아니, 노처녀 히스테리야.”
연우가 지상에게 속삭이자 돌아온 대답이다.
“오늘은 늦었어. 지금 출발해도 도착하면 한밤중이야. 내일 가는 걸로 하지. 자, 문 수석도 뭉쳤으니 단합의 의미로 회식을 하죠.”
지상이 남몰래 수진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눈을 흘기며 신용카드를 건넸다.
삼겹살이 구워지며 얼큰하게 취한 지상이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떨어지면 한 방울이지만, 함께하면 바다가 되듯이 우리, 내일도 고생합시다!”
그들은 식당을 나섰다.
“문 수석, 집이 어디야?”
“홍은동이에요.”
“그래? 내 집은 불광동이야. 같이 타고 가다가 먼저 내리면 되겠네. 빨리 택시 잡아.”
세호는 웬 떡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힘들지?”
“아니에요.”
“네 마음을 내가 다 알아. 이 세상살이가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겠지.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걱정은 임꺽정이나 하라고 해.”
“아니라고요!”
세호는 짜증을 냈다.
“아, 미안. 그나저나 고마워. 지난 일을 잊지 않고 도와주러 와줘서.”
“그건 당연한 거죠.”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는 바위에 새기고 은혜는 모래에 새기거든.”
“저는 달라요. 여기서 내릴게요.”
택시는 다시 출발했다.
‘폐인인 놈이, 왜 폐인을 찾아왔을까?’
지상은 그와의 인연을 아련히 떠올렸다.
검찰청 복도를 지나가는 검사들이 수군거렸다.
“최연소 사시 수석, 강지상 검사실 시보라며? 어때?”
“말도 마. 이놈이 사회생활을 몰라도 한참 몰라.”
“본래 머리만 좋은 애들이 다 그렇잖아.”
부장검사가 세호를 꾸짖었다.
“여기는 조직이야! 시보니까 그냥 대충 하면 된다는 거야? 저번에도 엄청 문제를 일으켰다던데. 이건 뭐, 자기만 잘났어. 그러시면 혼자서 검·판사 다 하세요!”
이때 지상이 들어와 풀죽은 그의 곁에 섰다.
“부장님, 제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겁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강 검사가 그렇게까지 하면…. 차나 한 잔 하고 가지?”
“처리할 사건이 있어서요. 끝내고 오겠습니다.”
그는 가만히 세호의 옷자락을 잡아 문으로 이끌며 나갔다.
휴게실에서 지상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 그에게 건넸다.
“문 시보, 힘들지?”
“아, 아닙니다.”
“그래 뭐. 아직 젊은데 욕먹으면서 배우는 거지. 듣기로는 사시 수석이라던데?”
“네, 맞아요. 헤헤….”
“앞으로는 문 수석이라고 부를게. 모르는 거나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고 부탁해.”
“그럴게요.”
두 사람이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직원들이 속삭였다.
“저거 봐. 또 강 검사 뒤에 숨었네.”
“문세호, 저 친구는 강 검사가 커버를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 강 검사는 정말 인내심이 대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