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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건물에 들어서던 지상은 왠지 뒷골이 찜찜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날쌔게 몸을 숨겼다.
“태양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구나. 조심해야겠어.”
그때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요원에 의해 기탁에게 보고되었다.
지상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 놈이 왜 나를 보자고 하지?’
그가 커피숍에 들어서자, 기탁이 손을 흔들었다.
“우리, 환영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사실 나, 강 변을 존경해.”
“뭔 헛소리야? 너 오다가 날벼락이라도 맞았냐?”
“그렇잖아. 사시 꼴찌가 검사가 되고, 최고 로펌에서 일했으니,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잖아."
“그래서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나를 만나자고 한 거냐?”
“아니, 그래도 동기니까 폐인 된 친구를 도와주고 싶어서.”
“썰 그만 풀고 용건만 말해.”
“넌 포커를 치면 안 되겠다. 얼굴에 패가 다 드러나.”
“뭐, 지킬 게 있어야 뻥카를 치지.”
“강 변, 값 많이 떨어졌네.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아무 사건을 덥석 물면 어떡하냐? 가오가 있지. 눈 반쯤 감고 대충 사는 게 인생이야.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 같잖은 정의의 사도 놀이하면서.”
“정의의 사도라… 가끔 너 같은 놈들에게 감사해. 상식적인 행동을 해도 너희는 그걸 정의로운 일처럼 보이게 만들거든. 너도 조심해라. 내 한 방에 한순간에 훅 간다.”
“딱 봐도 검사하다가 왜 잘렸는지 알겠네!”
“나는 검사 잘린 적 없어. 스스로 그만둔 거야.”
기탁은 어깨에 힘을 주며 명함을 던졌다.
“나, 팀장으로 승진했다. 내 밑에서 일할 의향이 있다면 말해. 그리고 이 재판에서 이기면 도원그룹으로… 아, 아니야.”
‘아직은 일러. 촉이 빠른 이 녀석에게 빌미를 줄 수도 있어.’
“뭐? 도원 법무팀장으로 가는 거냐? 두 회사가 한통속이니 직원들끼리 물물교환을 하는구나. 아쉽네! 법무실장으로는 못 가서. 하긴, 네 인성으로는 그 자리까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가지.”
“너, 그거 알아? 헌법 제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은 정말 웃기는 개소리지. 법 앞에 딱 만 명만 평등하다고. 수컷의 인생은 그 만 명에 속하느냐 아니냐의 싸움인 거야.”
“그게 네가 아득바득 사는 이유냐?”
“솔직히 너도 그런 야망이 있었잖아. 지금은 폐인이 되었지만.”
“그래서 잘난 이 명함 새기려고 사람들을 속이고, 회유하고, 매수하고…. 안 봐도 비디오다. 태양에 가서 전해라. 너희가 어떻게 승소하는지 알기 때문에 나중에 발뺌하지 말라고.”
“글쎄요. 저 같은 어쏘 변호사가 뭘 알겠어요? 위에서 시키면 해야죠. 강 변, 이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을 해도 소용없어. 오히려 형량만 가중될 뿐이야.”
“무죄인데 형량이 뭐가 중요해?”
“무죄라고? 증거와 증인들이 넘쳐나는데?”
“과연 그것들을 믿을 수 있을까? 너, 내가 태양에서 왜 나왔는지 알면서도 이러는 거야? 기억이 없는 건지, 없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선택적 기억상실증이냐?”
“가끔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법이야. 넌 그걸 인정하지 않은 대가를 치른 거지. 단단히 착각하나 본데, 너는 태양에서 추방당한 거야. 그리고 그 역할은 누가 강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었지. 다시 말하지만, 이 재판은 하나 마나야. 그나마 친구를 위해 패소율을 줄여주려는 거라고.”
“말장난은 그만하자. 근데 내가 이 사건을 수임한 걸 어떻게 알았어? 감시하냐?”
지상은 미행에 대해 시치미를 뗐다. 앞으로 역이용하려는 속셈에서였다.
“태양 입장으로는 요주의 인물이지. 우리를 실체를 가장 잘 아는 인간이니까. 그러니 네 동선은 우리 레이더에 잡혀 있어. 강 변, 이 싸움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냐?”
“법정 공방은 싸움이 아니야. 법리라는 엄연한 규칙이 있는 다툼이지. 그런 점에서 내가 불리하지 않다고 보는데?”
“법리라? 하하하… 그 무모한 용기가 가상하네. 너, 날 감당할 수 있겠냐?”
“깡패나 조폭처럼 연장으로 전쟁을 벌이면 힘들겠지만, 법리로 승부한다면 내게도 승산이 있지.”
“태양이 깡패, 조폭이라고!”
잔을 쥔 기탁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강 변,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안 바뀌는 게 뭔지 아냐?”
“뭔데?”
“힘이 진실을 만든다는 것! 돈이 정의라는 것!”
“그러나 정의는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어.”
“뭘 모르네. 이기는 게 정의라는 것을.”
“그래도 정의는 살아있단 말이야!”
“풋, 네가 이렇게 흥분하는 건 결국 정의가 죽었다는 걸 인정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정의는 승자의 말이지.”
“참으로 망할 놈의 팩트네.”
“마지막으로 하나 충고해 줄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지. 우리는 밟은 지렁이를 꿈틀거리지 못할 때까지 완전히 짓밟아. 그러니 쥐 죽은 듯 있어. 영, 원, 히.”
“하지만 지렁이도 밟히면 아프고, 아프면 꿈틀거리게 되지.”
꿀꺽, 커피를 삼키는 지상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기탁이 봉투를 내밀었다.
“요즘 사무실 임차료도 못 낸다며? 내가 두둑이 넣었다.”
“이거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네.”
“뭘,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잖아. 네가 이 재판에서 사임하면 대표님께 말해 태양 복직에 힘써 볼게.”
“너, 약을 치는 거냐? 거래하자는 거냐?”
“아니, 이길 수 없다면 이길 수 있는 편에 서라는 거야. 세상은 멋진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사람이 멋진 놈이야. 딱 까놓고 원하는 액수를 말해?”
“그래? 한 장.”
“좋아. 1억 주지.”
“그 한 장을 백 번 세어 봐.”
“뭐? 100억을!”
“몰랐어? 그게 내 최저 수임료야. 글구 넌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냐?”
“당연하지. 돈이 진심이니까.”
“나는 돈보다 가족, 친구, 사랑...”
“너, 소설 쓰냐? 그런 것들은 돈 없으면 다 떠나는 거야. 두 장 줄 테니 여기서 손 떼.”
“네 눈에는 이 재판이 판돈이 오가는 도박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 의뢰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야. 하긴 돈밖에 모르는 놈한테는 소귀의 경을 읽기겠지만.”
“이 돌대가리 자식아! 이런다고 네게 한 푼이라도 이득이 되냐? 아주 네가 관 뚜껑을 열고 드러눕는구나!”
쿵, 지상이 머리로 그의 코를 들이박았다. 기탁은 코피를 흘렸다.
“이제 내가 돌대가리라는 걸 확실히 알겠지? 아무튼 고마워. 이 돈은 폭행죄로 벌금 나오면 낼게. 그리고 더 이상 양심적 전과자가 되지 마라.”
지상이 나가자, 그는 휴지로 코를 막고 휴대폰을 들었다.
“대표님, 강 변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하기야 그놈은 상식적으로 말이 통하는 인간이 아니지. 머리통이 나쁜 건지, 최후의 발악을 하는 건지…”
“빈틈없이 준비해서 숨통을 끊어버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전에 태양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먼저 입사한 기탁은 승소율이 높아 잘 나갔다. 지상은 검찰 출신으로 형사소송을 주로 맡았고, 기탁은 기업소송으로 분야가 달라 대면할 일이 별로 없었다. 가끔 사내에서 마주칠 때도 과거의 사건으로 서로 무시하곤 했다.
그날 저녁, 지상은 소주를 병나발 불었다. 안주는 고작 새우 과자였다. 탁자에 펼쳐진 신문 기사에 눈물이 떨어져 번졌다.
‘게임 벤처로 촉망받던 젊은 사업가,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 도원 엔터테인먼트의 횡포를 죽음으로 고발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여기서 상태의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괴물 집단의 살인은 끝없이 이어질 거야.”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한정식집에서 윤철은 성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강지상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습니다.”
“법무팀장 자리를 제안했는데도?”
“그 놈은 영웅 놀이에 빠진 골통입니다. 검사 시절에도 자칭 정의파라고 우쭐댔지요.”
“그런데도 수사와 법리에 뛰어나 자네가 스카우트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점은 인정하지만… 제가 여러 방면으로 손을 써놨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아우만 믿겠네. 하지만 이것은 명심해. 만약 이 일이 잘못되면 우리의 우정은 깨지고 사업상 계약은 파기된다는 것을.”
“네.”
윤철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개자식! 골수까지 장사꾼이라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거네.’
그때 기탁이 들어왔다.
“대표님, 일찍 오셨네요.”
“응. 곧 고석낙 검사가 올 거야.”
“네?”
“뭘 그렇게 놀라? 동기니까 서로 잘 알잖아.”
“그렇긴 해도.”
“제가 좀 늦었네요.”
석낙이 들어서자 기탁과 눈이 마주쳤고, 순간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분위기가 왜 이래? 이제부터 둘은 동맹인데 이렇게 불편하면 안 되지. 자, 잔들 받아?”
“저는 음료수로….”
“아! 오 팀장은 술을 안 마시지.”
윤철은 작업을 위해 서먹함을 깨야 했다. 이어 넌지시 경쟁을 부추겼다.
“내가 살아보니 세상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 그래서 인생에 기회가 왔을 때는 반드시 잡아야 해. 다만 그것도 준비된 자에게만 허락되는 거지.”
“그럼요.”
“그렇지요.”
두 사람은 일시에 맞장구쳤다.
“성호사설에 피지상심(披枝傷心)이라는 말이 있어.”
“‘곁가지는 쳐내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키우지 말라’는 뜻이죠.”
윤철의 말을 기탁이 냉큼 가로챘다. 곁가지는 물론 강지상을 의미한다. 이에 석낙이 덧붙였다.
“사전에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죠.”
“역시 브레인들은 다르군. 더 이상 내 설명이 필요 없겠네.”
윤철은 재판에서 공조를 지시하며 자리를 떴다.
“어이, 오 차석. 태양에서 잘 나간다던데, 술 한 잔 사지? 예전엔 수석이었으면 뭐하나? 자네도 알다시피 국민의 공복인 검사는 박봉이잖아.”
석낙은 슬며시 과거를 들추며 기탁의 기를 죽였다.
“하기야 검사도 공무원이니까. 힘들면 태양으로 와. 내가 생활고는 책임질게.”
기탁은 머지않아 태양의 대표가 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조선 말도 모르나? 돈이 권력을 굴복시키잖아.”
“그렇다고 차석이 수석이 되냐? 언제든지 위치는 바뀔 수 있어.”
“어떤 의미야?”
“차석은 몰라도 돼.”
‘인마, 나는 검찰총장이 될 사람이야.’
신경전이 팽팽했지만, 곧 그들은 공동의 적인 지상을 안주 삼아 동지가 되었다.
“우리가 남이가!”
건배 구호가 2차 룸살롱까지 울려 퍼졌다.
기탁은 비밀리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 후 경찰, 국정원 등 정보요원 출신으로 TF팀을 구성하고 배심원 후보자들의 신상 파악에 착수했다. 동시에 모종의 계략을 세우며 중얼거렸다.
“성 밖에서 쏘는 화살보다 성 안에서의 분열이 더 치명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