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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길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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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연우와 상아는 사무실을 나와 걸어가던 중, 명품 매장에서 나오는 도희와 마주쳤다.

“두 사람 아는 사이야?”

“그, 그러니까… 친구의 동생인데 우연히 만났어.”

도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는 당황하며 둘러댔다.

“정말이야? 자기 친구는 내가 다 아는데, 누굴 말하는 거야?”

“중학교 동창인데 10여 년 만에 연락이 닿았어.”

“근데 친구의 여동생은 왜 만나?”

“사실은…”

연우는 해명하려 했지만, 상아의 눈짓에 말을 멈췄다.

“지금 두 사람 뭐 하는 시추에이션이야!”

“그 얘기는 다음에 하죠.”

도희가 발끈하자, 연우는 억지로 그녀를 끌고 앞서 나갔다.

“자기, 아무래도 수상해. 뭔가 있지?”

“나중에 말할게. 그런데 서로 아는 사이야?”

“내가 저딴 애를 어떻게 알아!”


다음 날, 도희는 커피숍으로 상아를 불러냈다.

“너 솔직히 말해. 연우 씨와 무슨 관계야?”

“오빠 친구라고 했잖아. 글구 네게 시시콜콜 말할 의무가 있어?"

“당연하지. 나는 연우 씨의 애인이고 곧 결혼할 거니까.”

“난 관심 없어.”

“우리 자기를 왜 만났어?”

“상태 오빠 일로 만난 거야.”

“몇 번 만났는데?”

“너 지금 나를 취조하니?”

“말해!”

도희가 물컵을 확 뿌렸다. 상아도 컵을 쥐었지만, 차마 뿌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백도희, 잘 들어. 우리 오빠는 절대 운전하지 않았어. 내가 블랙박스를 찾아서 꼭 진실을 밝힐 거야. 두고 봐!”

“야! 계집애야! 거기 서!”

도희는 악다구니를 썼다.


“아빠, 큰일났어요. 방금 상아를 만났는데, 상태가 운전한 게 아니라며 블랙박스를 찾아서 사실을 밝히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너만 알고 있어라. 이미 블랙박스를 회수해서 폐기했단다.”

“그럼, 오빠가…?”

“도희야, 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해.”

“이제 어떻게 하려고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전혀 모르는 거다.”

“네.”

도희는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으로 진실에 눈을 감았다.


기탁은 태양로펌의 대표실로 들어섰다.

“엊저녁에 바빠서 연락을 못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윤철은 대꾸도 잊은 채 TV 뉴스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금 속초 신풍리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사건의 피고인이 검찰에서 보강 조사를 받고 나왔습니다….”

수갑을 찬 상태에게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교도관이 간신히 길을 열어 그를 호송차에 태웠다. 그 뒤 수진이 나오자 기자들이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피고인은 여전히 백도진 씨와 운전을 교대했다고 주장합니까?”

“피고인이 결백하다면 누명을 쓰고 있다는 건가요?”

“이 사건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신청한 이유가 뭐지요?”

수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에게 공정한 재판을 요청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의뢰인이 무죄라고 확신합니다.”

윤철은 미간을 찌푸리며 TV를 껐다.

“강지상이 이 사건을 맡았지?”

“그런데요?.”

“오 팀장은 사건에 대해 알고 있나?”

“지금 소송으로 겨들이 없어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리고,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습니다.”

“그 소송은 박 변에게 넘기고 자네가 이 재판을 맡도록 해.”

“네? 그 이유라도?”

“백 회장 자제와 피고인 간의 진실 공방 때문이야.”

“이 사건은 목격자들이 있어 다툼이 없는 것으로….”

“물론 검찰 측이 유리하긴 하지. 하지만 국민참여재판에서는 배심원 평결을 무시할 수 없잖아.”

“아직 배심원 선정도 안 됐는데요?”

“곧 되겠지. 그런데 배심원 평결은 변수가 생길 수 있어. 만약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나?"

“반대로 백 회장 자제가….”

“바로 그거야. 그래서 백 회장이 우리에게 작업을 지시한 거지. 그것도 은밀하게.”

“그렇다면 증인과 배심원들을….”

“역시 오 팀장은 눈치가 빠르군. 또, 자네는 이런 소송 경험이 있잖아.”

윤철은 이전에 증인을 매수하여 승소한 경험이 있는 그를 적격자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른데...?”

기탁이 망설이자, 윤철은 유혹의 말을 던졌다.

“오 팀장이 이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도원그룹 법무팀장으로 갈 거야. 앞으로 태양의 대표가 되려면 대기업 법무 경력이 대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겠어?.”

“정, 정말요?”

“약속하지. 이 작업은 오 팀장에게 전권을 부여할 테니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해.”

‘같은 팀장이라도 도원 법무실은 태양과는 급이 달라!’

“기필코 해내겠습니다.”

그때 기탁의 휴대폰이 울렸다.

“강지상이 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했다고? 지금부터 놈의 일거일동을 감시해!”

“그 자식과는 모진 악연이네. 소송에서 완패해 태양의 명성을 훼손하더니, 이제는 재판에서도 사사건건 방해를 하니 원."

윤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작업에 필요한 건 무엇이든 말해.”

“네.”

“참, 자네와 강 변호사가 사시 동기라던데?”

“저는 차석이고 그 친구는 한참 아래라서 레벨이 다르지요. 또 지금 저는 최고 로펌의 팀장이고 그 인간은 폐인이나 다름없어요.”

“그렇군. 아! 고석낙 검사와도 동기지? 연수원 시절에 맞수였다면서?”

“서로 엎치락뒤치락했죠.”

“조만간 고 검사를 만나게 될 거야.”

“왜요?”

“이 사건의 공판 검사가 고 검사잖아. 그러니 아군끼리 협력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긴 하지만…”

기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석인 석낙에게 패배 의식이 있어 만남이 껄끄러웠다.

“지금부터 모든 소송에서 손을 떼고 이 재판에만 집중해.”

“네. 대표님과 백 회장님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대표실을 나온 그는 멀리 보이는 도원그룹 사옥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저곳에 입성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 도원 법무팀장을 찍고 유턴하여 태양의 대표라. 커리어 한번 죽여주는구먼. 이제 태스크 포스를 조직하고 증인과 배심원을 작업하려면 바빠지겠네. 근데 작전명은 뭐로 정할까? 그래! ‘백 공자 구하’가 좋겠어. 석낙이 검찰총장이 되면 무슨 소용이야! 돈이 권력을 이기는 세상인데. 내가 술을 안 마시는 것도, 태양으로 직행한 것도 다 돈에 대한 한이 맺혀서 그런 거잖아.”

기탁은 촉촉한 눈으로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했다.


소형 어선에서 한 시신이 육지로 옮겨졌다. 그것은 아버지였다. 엄마는 그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기탁은 엄마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후, 엄마는 바닷가의 대폿집에서 드럼통 탁자를 두드리며 억척스레 자식들을 키웠다.

어느 날, 그는 술집 문밖에서 술에 취한 놈이 엄마의 젖가슴을 주무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세상을 달관한 듯한 엄마의 그 슬픈 표정을...

그때 기탁은 결심했다.

“난 어른이 되어도 절대 술을 마시지 않을 거야!”

비 오는 날, 엄마는 탁주에 눈물을 담아 마시며 ‘여자의 일생’을 구슬프게 부르고는 그를 불렀다.

“기탁아, 사람들이 엄마를 화냥년이라고 부른단다. 네가 청상과부 자식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해.”

아침에 책상 위에는 엄마가 억지웃음을 팔아 번 학용품비가 놓여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시험마다 우등상을 받았다. 엄마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펴졌고,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웃었다.

기탁은 새 옷을 사본 적이 없다. 항상 형의 옷을 물려 입었다. 그럼에도 엄마의 적은 수입으로는 다섯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어떤 날은 도시락을 싸지 못해 운동장 수돗가에서 물로 배를 채웠다. 아직도 엄마는 그 사실을 모른다. 아니, 말하지 않았다. 엄마를 또 울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공부를 잘했기에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았고 인기도 좋았다. 언젠가 반장 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사퇴했다. 그 이유는 임원이 되면 학교 행사에 찬조금을 내야 하고, 소풍 날에는 선생님의 도시락을 책임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빨리 커서 많은 돈을 벌어야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결심했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자리에 앉아보게. 사실은….”

윤철의 말이 길어질수록 수찬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면 조 변호사는 파트너 변호사가 될 거야.”

“감, 감사합니다.”

일반적으로 로펌은 1~3년 차의 주니어 변호사와 4년 차 이상의 시니어 변호사, 그리고 사건 수임료에 지분을 갖는 파트너로 구성된다.

수찬은 주니어 변호사이고 기탁은 시니어 변호사다.

“우리 미선이와 진도는 잘 나가고 있나?”

“생각보다 미선 씨가 고집이 세서….”

“외동딸이라 그런 거야. 일찍 엄마를 여의고 내가 줄곧 키우다 보니 자기 주관이 강한 편이지. 하지만 그게 미선이의 매력이기도 해. 아! 언젠가 이 태양을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하는데, 이왕이면 가족이 좋지 않겠어? 더욱이 조 변은 법률가 가문 출신에 하버드 로스쿨 졸업이니 태양의 대표로 손색이 없지. 이번에 조 변이 오 팀장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줘.”

윤철은 그의 내심을 알고 은근히 기탁과의 경쟁을 부추겼다.

“제 영혼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리고 미영 씨의 마음도 쟁취할 것입니다.”

“과연 조 변의 멘탈은 갑이야. 난 자네의 이런 점이 맘에 들어.”

수찬은 벅찬 가슴으로 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이 작업이 성공하면 나는 파트너 변호사가 되고 기탁이는 도원 법무팀장으로 간다. 자연스럽게 적수가 없는 동안 윤 대표의 사위가 되어 태양을 차지하면 끝이네. 역시 난 줄타기가 체질이야.”

이렇게 두 사람은 태양의 대표 자리를 놓고 동상이몽을 꿨다.

수찬을 기다리던 기탁이 물었다.

“대표님께서 뭐래?”

“도원그룹 자제 사건을 오 팀장님과 함께 하라고 하시네요.”

“그래? 조 변은 변호사가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해?”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것 아닐까요?”

“틀렸어. 우리의 역할은 오히려 분쟁을 일으키는 거야. 사람들이 피 터지게 싸워야 재판을 하고, 그래야 수임료를 챙기잖아. 재판은 중간이 없어. 승소와 패소만 있을 뿐이지. 따라서 승소를 위해서는 거짓도 우리에게 유리하면 진실로 바꿔야 해. 조 변, 어릴 때부터 영민했다며? 주변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컸겠네.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게 뭔지 알아?”

“글쎄요.”

“바로 돈이야. 법도 결국 돈을 따라가. 가진 자의 편이란 말이지. 또 우리 같은 사람 수백 명을 살 수 있거든."

“그렇군요. 팀장님, 강지상 변호사는 어떤 사람인가요? 전에 검사였다고 하던데.”

“한 번 물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 물귀신 저리 가라야. 본인은 정의롭다고 믿겠지만,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야. 그저 각자의 욕망대로 살아갈 뿐이지. 그리고 나와 태양과는 악연인 친구야.”

“그러면 빨리 끊어야겠네요.”

“이번에는 완전히 단절될 거야. 조 변, 이 좁은 땅에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마법의 단어가 뭘 것 같아?”

“물론 돈이죠.”

“빙고! 그럼, 우리 돈 벌러 가볼까?”

“좋아요.”

서로의 마음이 일치한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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