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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식집에서 성국의 이야기를 듣고 윤철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사석에서는 형님이라고 불러. 자넨 내가 아끼는 고향 후배잖아.”
“네, 근데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이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리지?”
“그렇죠.”
그때 윤철의 휴대폰이 울렸다. 통화를 마친 그는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무슨 일이야?”
“피고인 변호인으로 강지상이 선임되었다고 하네요.”
“강지상이 누구야?”
“검사로 일하다가 돈을 쫓아 태양으로 이적한 친구입니다. 수사와 법리에 뛰어나서 제가 스카우트했죠.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그 친구의 별명이 미친개입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해서요.”
“그런데 왜 최고 로펌을 나갔어?”
“로펌에서 일하려면 검사의 묵은 때를 벗겨내야 하는데, 원칙대로 하다 보니 승소율이 낮은 거예요. 게다가 의뢰인들의 컴프레인과 팀원들과의 마찰이 심해지자 퇴사를 하더군요.결국 로펌의 생리에 적응하지 못한 거죠.”
“요즘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
“패소 변호사로 소문이 나서 힘든 것 같아요.”
잠시 생각하던 성국이 말했다.
“강지상에게 도원 법무팀장 자리를 제안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어 보게.”
“뭐라고요?”
“나는 그룹의 절반을 잃더라도 도진이를 지킬 거야.”
“형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일은 아우만 믿겠네.”
“시도는 해보겠지만….”
“이 재판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국민참여재판이니 배심원이죠.”
“검찰은?”
“검찰도 중요하지요.”
“재판부는?”
“최종 판결은 재판장이 내리지만 대개 배심원 평결을 따르죠.”
“그럼, 검찰, 법원, 배심원 모두 포섭하면 어떨까?”
“형님, 그건 곤란합니다. 아니, 위험해요.”
윤철이 반대하자 성국은 인상을 썼다.
“아우가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 자네가 수일 사건으로 검사장에서 쫓겨나 법복을 벗었을 때, 태양을 설립하고 대표로 앉힌 게 바로 나야. 이번에 은혜를 갚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만일 거절한다면, 앞으로 도원의 모든 소송 수임을 다시 고려해 보겠네.”
“그건….”
“사실 도원 법무실에 맡겨도 되지만, 분명히 소문이 날 거야. 그래서 비밀리에 태양이 처리하라는 거지.”
“네.”
“이제부터 세부 사항은 이 실장과 상의하게. 필요한 것은 뭐든지 말만 해. 우리는 영원한 형제가 아닌가! 허허허.”
성국이 호탕하게 웃자,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형제 같은 사이지,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잖아.’
그날 저녁, 윤철은 책상에 턱을 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놈은 법무팀장 아니, 법무실장 자리를 제시해도 타협할 자식이 아니야. 오히려 우리의 개입을 폭로할 놈이지. 그러면 태양은 범죄 로펌으로 낙인찍히고, 나는 사회에서 매장당할 거야. 이것 참 진퇴양난이군.”
고심 끝에 그는 단념하기로 했다. 그래서 차선책을 쓰기로 결정하고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나야, 박 부장. 내일 사무실에 놀러 가도 되나?”
윤철은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실로 들어갔다.
“요새 바쁘다면서?”
“말도 마세요. 총장이 바뀌어서 기강을 잡느라 어수선해요. 근데 찾아온 연유가?”
“그냥 오랜만에 얼굴을 보려고.”
“에이, 프로끼리 왜 그러세요?”
“사실 부탁할 게 있는데….”
“뭔데요?”
“얼마 전에 발생한 도원그룹 후계자의 교통사고 사건을 알지?”
“그럼요. 그 후계자의 변호를 태양로펌이 맡았잖아요. 다음 달에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릴 예정이고요.”
“그 사건 수사 검사가 고석낙이지?”
“그런데요?”
“고 검사를 만나려고 왔네.”
“왜요?”
“만약 말이 통하는 친구라면 공판까지 맡겨도 괜찮겠나?”
“공판 검사를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아요.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되니까요.”
“박 부장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
“선배님이 그럴 분인가요? 알겠어요.”
“고마워. 자네 차 트렁크에 작은 선물이 있을 거야.”
“큰일도 아닌데, 뭐 그런 걸? 역시 선배님의 기브 앤 테이크 성격은 여전하네요.”
“그런가! 하하하.”
‘개, 돼지도 밥을 주는 사람을 주인으로 알지. 그래야 충성을 다하는 법이고.’
윤철은 쓴 미소를 지었다.
부장검사의 호출을 받은 석낙이 들어왔다. 윤철은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흘긋 보고는 기선 제압에 나섰다.
“우리가 근무할 때는 선배를 하느님처럼 여겼는데, 요즘은 많이 느슨해진 것 같아.”
“선배님, 검사 생활에 낭만이 사라진 지 오래예요. 그 시절이 그리워요.”
박 부장이 맞장구쳤다.
“고 검사, 인사드려. 내가 평검사 때 모셨던 사수님이시고, 최고의 로펌 태양의 대표시네.”
“안녕하십니까. 고석낙 검사입니다.”
“고 검사는 우리 지검의 에이스예요.”
“반가워요. 실물이 훨씬 잘생겼구먼! 고 검사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말씀을 낮추세요.”
“허허허, 내가 아직도 검사장인가? 감히 고 검사님께 말을 놓다니. 아쉬운 건 나지 자네가 아니지 않은가?”
‘자네라? 겸손한 척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각인시키려는 거네.’
석낙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윤철은 존대와 반말을 섞어가며 대화를 시작했다.
“이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다면서요?”
“네. 일반 형사재판에서 바뀌었죠.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도 그에 대비해야 하니까…. 피고인 측 변호인으로 강지상 변호사가 추가 선임된 건 알아요?”
“네?”
“모르고 있었나 보네. 내가 알기로 두 사람이 사법연수원 동기라고 하던데?”
“그 친구요? 사시 꼴찌가 검사로 발령 난 전대미문의 친구죠. 그나마 근무하는가 싶더니 돈을 쫓아 조직을 떠났죠. 검찰을 대망신 시킨 친구입니다.”
“선배님, 그놈이랑 비교하는 것 자체가 고 검사에게는 명예훼손이에요. 고 검사는 그 기수에서 수석이었어요.”
“아, 미안해요. 법복을 벗게 되면 언제든 태양으로 오세요. 고 검사처럼 훌륭한 법조인이 오신다면 우리에게는 큰 영광이죠. 박 부장님께도 미리 약조를 받았어요.”
“그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현재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한다고 하던데 고 검사의 판단은 어떤가요?"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기소는 했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재판에서 어떻게 될지….”
석낙은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고 머뭇거렸다. 손해를 볼 게 없다는 계산은 진즉 끝난 상태였다.
“허허, 고 검사가 어렵게 자수성가해서 잘 모르나 본데, 우리 의뢰인의 부친인 백 회장님의 힘을 말이요.”
‘자수성가? 이미 내 뒷조사도 다 했나 보군.’
“죄송하지만 처리할 사건이 많아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고 검사, 이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인가!”
“암, 일해야죠. 고 검사를 보니 젊었을 때의 혈기왕성했던 내가 생각나서 뿌듯하구먼. 모름지기 검사는 이렇게 대쪽 같은 면이 있어야 검사답지. 그렇지 않나?”
“네에~ 선배님.”
알랑거리던 박 부장은 윤철의 눈짓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고 검사가 기소한 대로 공판을 밀고 나가세요.”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재판은 공판 검사가 하는 거라서….”
“아니요. 고 검사가 맡게 될 거요. 하실 거죠?”
‘벌써 부장에게 약을 쳤군.’
“하지만….”
일부러 석낙은 망설였다. 이제 답답한 쪽은 윤철이었다. 그는 미끼를 던졌다.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하잖소. 고 검사의 꿈이 검찰총장이라던데, 우리 태양이 그 길에 디딤돌이 되어주겠소. 게다가 고 검사는 수석이니 그 정도 목표는 당연하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고 검사를 믿겠소. 조만간 태양과 미팅이 있을 테니 그때 또 보죠.”
‘이 거래로 나는 내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석낙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윤철은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지검의 공판 검사들을 면밀히 조사했는데, 대부분이 금수저 출신이라 사탕발림이 통할 가능성이 낮았다. 도리어 비밀이 누설되면 역공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흙수저인 석낙의 야망을 이용하기로 했고, 그 전략이 효과를 봤다.
윤철이 나가자 박 부장이 들어왔다.
“고 검, 한발 물러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평검사 시절에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더라고.”
“무슨 말씀인지?”
“우리 같은 사람이 더 큰 성공을 거두려면 힘 있는 후원자가 필요하다는 거야.”
“독불장군처럼 혼자 갈 순 없다는 거죠?”
“맞아.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는 말 알아?”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리 강력한 권력이라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이죠.”
“도원그룹 자제 사건을 잘 처리해봐. 이번 기회에 우리와 최대 재벌, 최고의 로펌과 패밀리로 만들어 자자손손 만만세 하자고. 그래서 내가 특별한 자리를 마련한 거야.”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이래서 내가 고 프로를 좋아한다니까.”
박 부장은 서랍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사건 하나를 마무리하고 ‘샤토마고 빈티지’를 받았어. 근데 이게 혼자 마시면 뇌물이고, 함께 마시면 선물이 아니겠나?”
“그렇죠.”
두 사람은 능글맞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고 검, 자신 있지? 이 공판은 우리 지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여우 같은 기자들이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킁킁거리고 있어. 그 인간들, 우리 꼬투리를 못 잡아 안달 났으니 잘해.”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재판은 검찰 내에서 초미의 관심사였고, 석낙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공판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도원그룹 백 회장입니다.”
“아, 네. 네.”
‘이 사람은 태양 대표와는 사이즈가 다른 분이야.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 해!’
“고 검사님이 제 아들 사건의 공판 검사라면서요?”
“네. 그런데 어떻게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부족한 우리 아이에게 좀 더 신경 써주셨으면 해서요. 아! 고 검사님이 도원 장학재단 장학생이었다면서요? 그러면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네요. 허허허.”
‘교활한 영감탱이! 과거의 장학금으로 나의 목덜미를 잡겠다고? 내 아킬레스건을 건드려서 압박하려는 수작이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곧 검찰 인사이동이 있지요? 희망하시는 청과 부서를 귀뜸해 주세요.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고 검사님만 믿을게요. 재판이 끝난 후에 식사 자리를 마련하죠.”
대부분의 검사는 지방보다는 수도권 근무를 선호한다. 원칙적으로는 토착 세력과의 유착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 2년마다 순환하는 상피제도가 적용되지만, 예외도 있는 법.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 이 예외의 힘을 백 회장은 가지고 있다. 왜냐고? 재벌과 정치권, 정부는 서로 필요 불가결한 관계니까.
또한 검사는 중앙 부처를 선호한다. 법무부,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 먼 지방의 소도시로 갈수록 좌천이라는 인식이 있다.
석낙은 사법연수원 수석으로, 기수에서 선두에 속했다. 더욱이 검찰총장이 목표인 그에게 태양과 더불어 도원그룹이라는 최강의 조력자가 생겼다.
‘이제 양 날개를 달았으니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네.’
석낙은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리고 창가로 가서는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었다.
“아버지. 드디어 당신의 한을 풀 수 있게 되었어요. 제 꿈이 반절은 이루어졌거든요.”
이어 부친의 사건을 떠올렸다. 진실의 내막은 이랬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점심을 먹으며 술을 곁들였다. 석낙의 아버지는 밥만 먹었다. 그런 후 고층에서 작업하다가 평철 난간이 무너져 추락해 숨졌다.
이 비보에 엄마와 그는 병원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석낙아, 너는 이 아비처럼 살지 말아라. 반드시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숨을 헐떡이며 남긴 이 말은 부친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사고 이후, 엄마가 참고인으로 경찰서에 갔을 때 석낙은 따라갔고, 그곳에서 박 경장이 인부들을 조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고기남 씨가 근무 중에 술을 마셨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다면 고기남 씨가 술에 취해 떨어졌다는 거군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런 인부들의 진술 때문에 아버지의 사건은 음주로 인한 과실사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산업 재해 보상을 받아야 했지만, 오히려 비난을 샀다.
“고기남 씨의 사고가 산재로 판명되면 우리 회사는 건설 면허가 취소되어 문을 닫게 됩니다. 인부들과는 얘기가 다 끝났으니, 본인의 과실로 처리해 주세요. 박 경장님께는 섭섭지 않게 보답하겠습니다.”
조사실 밖에서 양복을 입은 사람이 박 경장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석낙은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당시 초등학생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이 종알거림뿐이었다.
“울 아빠는 술을 못 마시는데….”
그 후, 엄마는 생계를 위해 도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석낙은 주말마다 엄마를 따라가 고사리손으로 도왔다. 일을 마치고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이 그를 이끌었다.
어느 날 석낙이 물었다.
“엄마, 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밥을 얼마나 먹어야 해?”
“왜 그런 질문을 하니?”
“아빠가 꼭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
엄마는 그 의미를 알기에 석낙을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석낙아, 아빠의 말은 단순히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그러려면 엄마를 따라다닐 시간에 책을 많이 읽어야 해.”
“알겠어, 엄마.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갈게. 그래서 아빠의 말대로 꼭 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부친 사건의 진실은 훗날 드러났지만, 그때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석낙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검사를 지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