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 각성(Awakening)
8화: 대면(Confrontation)
지오와 강윤서가 복도에서 마주 섰다.
참묵이 흘렀다. 짧지만 영겁처럼 느껴지는 침묵.
강윤서의 차가운 회색빛 눈동자가 지오를 꿰뚫었다.
지오는 등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들켰다.
어떻게 대답하지?
지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거짓말할까? 도망칠까? 아니면...
[심리전의 시작]
“한지오 브로커,”
강윤서가 다시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차가왔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가?”
“저는...”
지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이어피스에서 은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오! 모르는 척 해요! 그냥 야근하러 왔다고!”
지오는 준비된 거짓말을 꺼냈다.
“긴급 고객 건으로 자료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야간에? 지하 20층에?”
강윤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곳은 중앙 서버실이 있는 층이네.
브로커가 접근할 이유가 없는 곳이지.”
“VIP 고객의 특수요청으로...”
“거짓말.”
강윤서가 한 걸음 다가왔다.
“자네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눈빛에서 보여.
긴장하고 있고, 두려워하고 있어.”
지오는 뒷걸음질 쳤다.
“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읽는 전문가야.”
강윤서가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8년 전까지 자네도 감정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 잠깐.”
강윤서의 눈빛이 변했다.
“이상하네. 자네 눈에... 감정이 보여.
두려움. 긴장. 그리고... 분노?”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한지오. 자네, 감정이 돌아왔나?”
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흥미롭군. 8년 동안 감정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감정을 되찾았어.
무슨 일이 있었나?”
“...”
“말하지 않겠다면 할 수 없지.”
강윤서가 손목의 통신기를 눌렀다.
“보안팀, 지하 20층으로 즉시 춮동. 불법침입자 확보.”
끝났다.
지오는 생각했다. 도망칠까? 하지만 복도 끝에는 엘리베이터밖에 없다.
비상계단까지는 강윤서를 지나쳐야 한다.
그 순간, 은별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급탈출작전]
“지오! 3초 후에 정전시킬거예요! 그때 도망쳐요!”
“3...”
“2...”
“1...”
탁!
갑자기 모든 불이 꺼졌다. 복도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뭐야?!”
강윤서의 당황한 목소리.
“지금이예요!”
지오는 즉시 달렸다. 어둠 속에서 강윤서를 스쳐 지나갔다.
“거기 서!”
강윤서가 지오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지오는 재빨리 피했다.
비상계단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쾅!
문이 닫혔다.
“위로! 위로 올라가요!”
은별의 지시.
“아래로 가면 막다른 길이예요! 1층으로 올라가서 탈출해요!”
지오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
“한지오!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나!”
강윤서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녀도 뒤쫓아 오고 있었다.
[지상으로 도주]
지하 18층. 지오는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하 15층.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뒤에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지하 10층.
“지오! 보안팀이 1층에서 대기 중이에요!”
은별의 경고.
“1층으로 올라가면 잡혀요!”
“그럼 어떻게 해요?!”
“지하 5층에서 나가세요!
거기 비상 출구가 있어요!”
“비상출구?”
“지하 주차장으로 연결돼요!
레오가 거기서 대기 중이에요!”
지오는 방향을 바꿨다.
지하 5층.
문을 열고 나왔다. 지하 주차장.
어두운 공간에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레오! 어디 있어요?!”
지오가 소리쳤다. 그 순간,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검은색 밴이 지오 앞에 멈췄다.
옆문이 열렸다.
“타!”
레오의 목소리. 지오는 급히 차에 탔다.
“쾅!”
“출발해!”
뒤에서 비상문이 열렸다.
강윤서가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레오가 엑셀을 밟았다. 차가 급출발했다.
강윤서가 차를 향해 달렸지만, 이미 늦었다.
차는 지하 주차장 출구를 벗어났다.
[5분 후. 도심 외곽]
검은 밴이 한적한 골목에 멈췄다.
지오는 뒷좌석에 쓰러져 있었다.
숨을 몰아 쉬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USB는?”
지오는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작지만 무거운 것.
“가지고 왔어요.”
“잘했어.”
레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차 안의 노트북이 커졌다.
은별이 원격으로 접속한 것이었다.
화면에 은별의 얼굴이 나타났다.
“지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은별...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당연한 거예요. 우리 팀이잖아요.”
은별이 미소 지었다.
“USB를 노트북에 연결해주세요.
데이터를 확인해야 해요.”
지오는 USB를 레오의 노트북에 꽂았다.
파일 목록이 화면에 떠올랐다.
27,439개의 파일.
“와...”
레오가 감탄했다.
“이게 다 프로젝트 제로 자료야?”
“네, 모든 증거가 여기 있어요.”
은별이 파일들을 빠르게 분석했다.
“프로젝트 제로 마스터 플랜. 감정 폐기 기록,
정부 계약서, 제거 대상 명단...”
“제거 대상 명단?”
지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명단에... 제 여동생이...”
은별이 파일을 열었다.
SUBJECT ELIMINATION LIST.dat.
명단이 나타났다. 수백 명의 이름. 그리고 그 중에.
“그들이... 지유를 죽였어...”
지오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사고가 아니었어. 계획된 살인이었어.”
레오가 지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진정해. 우리가 증거를 확보했어.
이제 세상에 폭로할 수 있어.”
“하지만...”
“복수는 나중이야. 먼저 이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해.”
은별이 말했다.
“지오, 제 부모님도 이 명단에 있어요.”
화면을 스크롤하자, 또 다른 이름들이 보였다.
은별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살 유도... 감정 조작...”
“그들이 당신 부모님의 감정을 조작해서 자살하게 만든 거야?”
지오가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은별이 화면을 닫았다. 눈가가 붉어졌다.
“우리 부모님은... 원래 자살할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항상 밝으셨고, 저를 사랑하셨어요. 그런데 감자기...”
“진정해.”
레오가 말했다.
“우리 모두 피해자야. 지오의 여동생, 은별의 부모님,
그리고 내 형의 딸도...”
레오가 화면을 다시 스크롤했다.
“내 형의 딸이야.”
“당신이... 강윤서의 시동생?”
“그랬지. 15년 전까지는.”
[레오의 과거]
레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민서는 형의 딸이었어. 착하고 밝은 아이였지.
하지만 윤서는 일 중독자였어. 항상 회사 일만 했지.
딸을 돌보지 않았어.”
“그래서 이혼했어요?”
“그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건 민서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야.”
레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학교 폭력 때문이었어. 민서는 매일 울었어.
나는 민서를 병원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윤서는 반대했어.”
“왜요?”
“윤서는 감정 치료를 하겠다고 했어.
회사에서 개발 중인 신기술로 딸의 우울증을 치료하겠다고.”
“감정 조작 기술...”
레오의 주먹이 떨렸다.
“그리고... 실험은 실패했어.
민서는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3개월 후에 죽었어.”
“어떻게...”
“공식적으로는 자살.
하지만 사실은...
감정이 없으니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 거야.
그냥... 죽음을 선택한 거지.”
침묵이 흘렀다.
“그 후 윤서는 미쳐버렸어.
딸을 죽인 게 자기 탓이라는 걸 알았지만,
인정하지 못했어.”
“그래서 프로젝트 제로를...”
“그래. 윤서는 생각했지.‘모든 부정적 감정을 없애면
더 이상 아무도 아프지 않을 거야’라고.”
“왜곡된 신념...”
“딸을 죽인 죄책감을 감추기 위한 합리화야.
윤서는 자신이 선을 행한다고 믿어.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어.”
지오가 USB를 쥐었다.
“이제 우리가 막아야 해요.”
“그래. 하지만 조심해야 해.”
레오가 경고했다.
“강윤서는 당신 얼굴을 봤어.
이제 그녀는 당신을 쫓을 거야.”
“알아요.”
“그리고 프로젝트 제로를 폭로하면...
정부, 재벌, 감정은행 모두가 당신을 적으로 삼을거야.”
“그래도 해야 해요.”
지오의 눈빛이 결연했다.
“이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해요. 지유를 위해서라도.”
은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이 할께요.”
“나도 마찬가지야.”
레오가 시동을 걸었다.
“이제 숨어야 해. 강윤서가 추적할거야.
안전한 은신처로 가자.”
차가 다시 움직였다. 지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밤의 서울이 흘러갔다.
지유야. 오빠가 진실을 밝힐게.
너를 죽인 사람들을 반드시 세상에 알릴게.
그리고 그 순간, 지오는 느꼈다. 8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 자신의 감정을.
슬픔. 분노. 그리고... 결의.
[같은 시각. Emotion Bank Tower.]
강윤서는 자신의 사무실에 서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한지오...”
그녀가 중얼거렸다.
“자네가 무엇을 가져갔는지 알아.”
책상 위의 홀로그램 화면에 보고서가 떠올랐다.
“모든 증거를 가져갔군.”
강윤서는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어.”
그녀는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어린 소녀. 밝게 웃고 있는 얼굴. 강민서. 그녀의 딸. “민서야...”
강윤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가 만들려는 세상은...
네가 아프지 않았을 세상이야.”
그녀는 사진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통신기를 눌렀다.
“보안 총책임자.”
“예, 이사님.”
“한지오 브로커를 추적하라. 그와 연과노딘 모든 사람도.”
“알겠습니다.”
“그리고...”
강윤서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프로젝트 제로 3단계를 앞당긴다. 1주일 후 가동.”
“1주일 후면...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상관없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알겠습니다.”
통신이 끊겼다. 강윤서는 창밖을 바라봤다.
“한지오. 자네가 진실을 폭로하기 전에,
나는 완벽한 세상을 만들겠어.”
“그게 내 딸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니까.”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