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회사 비개발자 이야기
나는 IT회사 비개발자다. 좋게 말하면 시키는 거 다 하는데 나쁘게 말하면 전문성은 없달까. Big 5 안에 드는 전통의 대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스타트업 이었다가 대기업이 된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만으로 11년이다. 그럼에도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음 글쎄요.” 입이 쉽게 떼 지질 않는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
“내가 뭘 하는 사람이지?”에 대한 고민은 오히려 해를 거듭할 수록 커져만 간다. 11년차 즈음이 피크고, 15년차쯤엔 내적 갈등 없이 편안해지는 시절이 올지 어떨지는 모른다. 아직 그렇게 안 됐으니까. 그런데 2~3년 정도 더 경력이 있는 주변 선배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자기가 뭘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알게 되기까지 생각보다 먼 길이 남았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지금의 회사를 다니며 이 고민은 더욱 깊어 졌는데, 회사의 인적 규모가 이전 회사 대비해선 작았고, (매출 규모도 전보다 작긴 했지만 매출의 크기가 일의 양과 비례하지만은 않으므로) 그렇기에 한 사람이 하는 일의 양이 많고 그만큼 직무별로 전문적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조직이라서 였을 거다. 플랫폼 사업을 하는 회사의 특성상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같은 전문가들이 골고루 포진돼 있다. 경영/회계/세무 같은 스태프 조직이나 CS(고객센터) 또한 할 일이 명확한 직무다. 이들을 제하고 나면 사업/운영이라는 애매한 포지션들이 남고, 그 안에 내가 있다.
“저는 UX디자이너에요.” “저는 iOS 개발자에요.” 같은 멋진 소개들 사이 어딘가에 있는 나는 “그냥 사업팀에서 일해요” 같은 답으로 자기소개를 얼버무린다. 때로는 “요즘은 00서비스를 보고 있어요.” 정도로 내가 위치한 좌표를 표시해보려고, 존재감을 드러내 보려고 한다. 하지만, ‘보고 있다’는 게 뭘까.
크게 봐서 내 일은 ‘의사결정 지원’. C레벨을 포함한 리더들이 우리 회사와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올바른 결정을 하게끔 지원하는 일이다. 그들은 많은 걸 결정한다. 스타트업에서 출발한 회사라서 인지 어떨 땐 너무 지나치게 많은 걸 결정한다. C레벨이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싶다. 어떤 사업을 해야 한다 접어야 한다-이건 결정할 만하다-부터, 서비스에 들어가는 유의사항 문구가 이러쿵저러쿵-이건 그냥 실무자한테 맡기는 게 낫다-까지. 이리 보면 어떤 사업의 go/no-go(할까/말까)를 결정할 정도니까 되게 어려운 일을 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바텀업(Bottom-up) 보다는 탑다운(Top-down)이 많아서다. 정말로 실무자가 ‘아 이거 접어야 하는 건 아닐까…. 너무 고민되는데,… 검토해 볼까….’가 아니라, “야! 접어! 왜 접어야 하는지 생각해와!”에서 출발한다는 뜻이다. 이미 정해진 방향과 결과 안에서의 고민이다.
비단 오늘내일 일도 아니다. 이전 직장에서도 ‘나 뭘 하는 사람…’의 고민은 있었다. 다만 고민의 깊이는 비교적 얕았던 것 같다. 우선은 내가 작은 사업을 ‘담당’했어서다. 그래도 하는 일이 명확하다는 생각이었다. 한 서비스의 사업/운영적 책임이 오롯이 나에게 있었으므로. 이 00서비스의 오너는 나야! 라는 책임감에 은근히 애정도 있었다. 다음으론 비교적 사회 초년생이었던 것도 작용했던 것 같다. 맡은 일들은 다 처음 하는 경우가 많았고 새로웠으며 주변엔 든든한 선배들이 있었다. 고민이 파고들 틈이 적었 달까. 반면 지금은? 큰 서비스를 기능 조직으로 잘라 뒀기 때문에, 나는 사업팀의 원 오브 뎀(one of them)이다. 나 없다고 다른 팀에서 알기나 할까. 하는 일은 어딘가 ‘그럴 줄 알았다’ 싶은 일들이 많다. 늘 새로운 이슈는 생기지만. 더 이상 내게 선배는 없다. 팀에서 가장 연장자에 속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후배까지 챙겨줘야 할 판이다.
그래도 11년을 지내 오고 있다. 신입사원 때는 “회사 10년 어떻게 다녀요? 대단해!” 라는 말도 했던 거 같다. “10년 진짜 금방 간다. 훅 가.”라는 답변을 이제는 내가 한다.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나를 고용 상태에 있게 하고, 지속적으로 야근에 시달리게 하는 업무량이 주어지고, 때로는 좋은 성과평가를 주기도 하는 걸 보면, 어쨌든 불필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내 스스로가 그렇게 마음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면 더 좋겠는데 말이다.
팀 활동으로 서로의 강점을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다. 갤럽의 ‘강점 혁명’이라는 프로그램이다. 나의 1순위 강점으로 꼽힌 건 ‘정리(Arranger)’ 테마. 설명은 이러하다. 당신은 체계를 세울 줄 알고 이를 보완하는 유연성도 갖추고 있습니다. 당신은 생산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모든 구성요소와 자원을 최적으로 조직하는 방안에 대해 궁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러 부서나 다양한 요소가 뒤섞인 복잡한 상황에 대해 최적화된 체계를 세울 수 있다, 고 이해됐다. 과연? 종종 ‘정리를 잘 한다’는 칭찬은 듣곤 했었다. 하지만 그건 문서 정리 혹은 서면 공유 시 내용을 잘 정리한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 ‘자료 정리 스킬’에 대해 팀내 공유해달라 요청 받은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뉘앙스가 좀 다르긴 한데…. 아무튼 정리는 정리. ‘정리’라, 그게 나의 기술일까?
여전히 고민은 계속이다. 내가 회사서 뭐 하는 사람인지, 왜 이 회사는 나에게 돈을 주는지, 나는 왜 하루의 절반을 뭘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매진해 있는지 말이다. 기술 없이 이리 저리 휩쓸리며 살아온 나의 기술은 무엇일까. ‘뭔가를 정리해내는 것’일까? 그것이 앞으로도 내 밥벌이에 도움이 될 만한 놈일까? 이직할 때 내세울 만한 차별화 포인트가 될까? 그러기엔 너무나 취약해 보이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