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 3(꼬리에 꼬리를 물 때)
왜구구단은
며칠 전 직장 생활에 필요한 교육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이틀간 통계교육을 들었다. 둘째 날 오후 첫 한 시간은 '미술감상'이었다. 강사는 이탈리아에서 도슨트로 활동했었고, 귀국 후 우리나라 대도시에서 미술 관련 강의를 많이 한다고 본인을 소개했다. 지방의 열악한 문화 인프라에 대한 한탄으로 강의의 문을 열면서 그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수도권이나 대도시에선 문화를 접하기 쉬운 반면 지방 소도시에선 이게 어렵다. 이 탓인지 대도시와 지방 소도시에서 강의할 때 수강생들의 눈빛이, 반응이 다른 편이다. 강사입장에선 아무래도 앞의 수강생들 눈빛이 더 초롱초롱함을 느낀다."
그의 강의는 평범했다. 소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그는 나름의 맞춤 강의를 한 것이다. 최근에 다시 읽은 G. K. 체스터턴의 <장난감 극장(봄날의 책, 강경이 옮김)>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처음에 작은 민족에게서 영감을 얻었던 이유도 알 듯하다. 방대한 그리스 철학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보다 작은 도시 아테네에 더 잘 맞았다. 단테는 피렌체의 좁은 골목에서 연옥과 천국, 지옥을 위한 공간을 창조했다. 영국 제국에 살았다면 단테는 질식했을 것이다. 거대한 제국은 진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거대한 규모로 시를 실현하는 일은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매우 큰 사상은 매우 작은 공간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 내 장난감 극장은 아테네의 극만큼이나 철학적이다.
어제는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었다. 은은한 느낌이라 독자들의 감상이 궁금해 블로그 검색을 해봤다. 대개 비슷한 방향에서 좋았다는 반응이 많았고, 일부는 평범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구는 "편견"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라 했다. 이 감상평을 읽으니, 박완서의 <대범한 밥상>이 떠올랐다.
세편의 이야기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머리에선 <장난감 극장>이, 마음에선 <대범한 밥상>이, 눈을 감은 머리에선 <대성당>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