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9일차: 자그레브, 파란색 트램과 레고 성당이 매력적인 도시
아침 8시에 일어나 숙소 테라스로 나갔다. 주황색 지붕이 빽빽한 로빈 전경을 보니 이번 여행의 출발지였던 프라하가 떠올랐다. 프라하를 떠난 지 벌써 3주가 되어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평온한 마을을 가만히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날은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로 가는 날이었다. 10시 10분에 자그레브행 버스를 타고 5시간을 이동해야 해서 아침을 반드시 챙겨 먹어야 했다. 빵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싶었지만, 빵집이 숙소에서 멀어서 전날 먹다 남은 귤과 바나나로 끼니를 때웠다. 한국에서는 골목마다 빵집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로빈에 오니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편리한 환경을 누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됐다.
숙소 체크아웃을 마친 후 캐리어를 끌고 버스 터미널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항구를 지나 마지막으로 로빈의 경치를 감상했다. 2박 3일간 지겹도록 봤는데도, 길게 뻗은 아드리아해와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파스텔톤의 건물들은 여전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작은 항구 마을의 매력을 뽐내며 크로아티아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120% 충족시켜 준 로빈이 고마웠다. 크로아티아의 다른 도시에 가면 '로빈보다 못하다'며 실망하진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로빈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커다란 관광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티켓 창구 직원에게 "이 버스 자그레브로 가는 거 맞아요?"라고 묻자 그녀가 "아뇨, 여기서 기다리시면 버스 한 대가 또 올 겁니다"라고 답했다. 대기하는 동안 배가 고파서 주변을 둘러봤다. 베이커리 카페가 눈에 띄었지만, 버스 출발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아서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슈퍼마켓에 갔다. 마음에 드는 초콜릿 하나를 고른 뒤 재빨리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는 풀라, 리예카 등을 거쳐 자그레브로 향했다. 중간중간 정류장에 정차했는데 휴게소는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 휴게소에서 간식도 사고 화장실도 가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처참히 무너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변이 마려워서 혼자만의 사투를 벌였다. 꾹 참고 버틴 끝에 종착지인 자그레브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스 터미널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캐리어와 크로스백을 단단히 붙잡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길을 건너 시내 방면의 버스를 탔다. 자그레브에서 첫 번째 목적지는 숙소인 더 도트 호스텔이었다. 한국에서 예약한 자그레브 숙소는 서브스페이스 호스텔의 다인실 도미토리였으나, 며칠 전 피란에서 아프고 나서 몸 상태가 신경 쓰여 개인실이 있는 더 도트 호스텔로 급하게 숙소를 변경했다. 더 도트 호스텔은 허름한 외관과 달리 방이 무척 깔끔했다. 넓은 침대와 초록색 그라데이션 침구, 개방감 있는 창문, 유튜브가 연결된 TV가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짐을 대충 풀고 자그레브 여행의 시작점인 반 옐라치치 광장으로 걸어갔다.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많은 양은 아니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길을 걷다가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결승에 진출해 프랑스를 상대로 투혼을 발휘하던 선수들의 얼굴이 보여서 반가웠다.
반 옐라치치 광장에는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대거 들어서 있었다. 그 앞에는 크로아티아 독립에 앞장선 반 옐라치치 총독의 기마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파란색 트램은 광장을 가로지르며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개인적으로 파란색을 좋아해서 전체를 새파랗게 휘감은 트램이 지나갈 때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자그레브 시내를 구경하다보니 어느덧 5시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Cro.K 한식당을 찾아갔다. 식당에 한국인은 없고 현지인으로 보이는 직원들만 있었다. 다양한 메뉴 중에 밥과 고기를 동시에 먹을 수 있는 불고기비빔밥을 선택했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지는 않았지만 장시간 공복 상태라 맛있게 먹었다.
식당에서 자그레브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오스트리아 빈의 슈테판 대성당을 모티브로 만든 건축물로, 1093년부터 지어져 1102년에 완공됐다. 이후 외세의 침략과 화재로 수난을 겪다가 189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됐다.
자그레브 대성당을 보자마자 웅장함에 압도당했다. 입구의 황금빛 성모 마리아상과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쌍둥이 첨탑은 위엄을 풍겼다. 성당 문이 열려 있어서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니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매우 엄숙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라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성수를 손에 묻히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풍경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경건한 자세로 미사를 지켜보다가 성 마르코 성당으로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여러 색깔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테마파크 같은 골목을 통과하니 돌의 문이 나타났다. 돌의 문은 1731년에 화재가 크게 일어나 대부분이 소실됐는데, 성모 마리아 그림만 온전히 보존돼 사람들이 감사함을 표하고 내부에 작은 예배당을 지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 그림이 있는 철창 앞은 성지 순례를 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소망이 꼭 이루어지길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돌의 문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니 성 마르코 성당이 보였다. 가장 먼저 세련된 색감의 모자이크 타일 지붕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흰색, 청색, 적색 등 크로아티아 국기 색상이 격자 무늬로 들어가 있었는데, 레고를 조립해놓은 것 같아서 귀여웠다. 유럽에서 숱하게 봤던 웅장한 성당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좋았다. 지붕 왼쪽에는 크로아티아 문장, 오른쪽에는 자그레브 문장이 장식돼 있었다. 성 마르코 성당은 1256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1334년에 자그레브 교구의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고딕 양식이 추가됐고, 19세기에 전쟁과 지진으로 성당 일부가 무너져 재건축됐다.
성 마르코 성당 맞은편에는 로트르슈차크 타워와 푸니쿨라 탑승장이 있었다. 자그레브의 푸니쿨라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거리(66m)를 오가는 케이블 카다. 1분이면 운행이 끝난다고 해서 푸니쿨라는 타지 않고 야경만 감상했다. 바로 옆 벨레 4세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성 마르코 성당으로 돌아왔다. 주변이 어두운 가운데 조명을 받아 성당 지붕의 색깔과 문양이 더욱 도드라졌다.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예쁘고 화려했다.
저녁 7시가 넘어 도착한 반 옐라치치 광장은 인파로 복작거렸다. 로빈에선 보기 힘들었던 한국인도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모처럼 대도시의 혼잡함을 느끼니 반가우면서도 불편했다. 거리에 줄지어 선 가로등을 따라 걷다가 숙소로 복귀했다. 방에서 일기를 쓰고 유튜브 영상을 본 뒤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