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8일차: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싶은 로빈 골목
오전 8시 30분에 눈을 뜨자마자 테라스로 나갔다. 하늘은 맑았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쌀쌀했다. 기온이 높아지는 낮에 외출을 하기로 하고 아침 식사는 웰컴 과일로 대신했다. 침대에서 한참 뒹굴거리다가 오후 1시가 돼서 밖으로 나갔다.
먼저 로빈 골목을 구석구석 탐방했다. 로빈은 낮은 임대료 정책으로 무명 화가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서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갤러리들이 많았다. 기념품 가게에는 현지 예술가들이 만든 예쁜 엽서, 마그넷 등이 진열돼 있었다. 상점 대문에 적힌 '현지 아티스트들을 지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구는 이곳이 예술가 마을임을 상기시켰다.
성당에서 직진하자 주황색 지붕과 낡은 돌 담벼락이 나타나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풍겼다. 옛 정취가 남아있는 골목을 오랫동안 누비고 싶어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미로 같은 골목을 통과한 후 티토 광장으로 이동하니 오후 4시 30분이었다.
아침에 과일만 먹고 끼니를 걸러서 배가 미친듯이 고팠다. 점심 겸 저녁을 먹기 위해 항구에 늘어선 식당 중 한 곳인 마리나에 들어갔다. 바다가 눈앞에 보이는 테라스에 앉았는데 바람이 매서워서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피란에 있을 때부터 계속 해산물을 먹어서 이번에는 트러플 소스를 두른 스테이크가 올라간 파스타를 주문했다.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조금 느끼했지만 간만에 고기를 먹은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항구 주변을 걷다가 멀티미디어 센터 앞 광장에서 사람들이 짝을 이뤄 춤추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중년의 남녀는 물론 젊은 동성 커플까지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댄스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베사메 무초'가 흘러나오자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단체로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블루스를 추는 진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며 리듬을 타는 모습들이 예뻐 보였다. 광장 건너편에 아드리아해가 넘실대고 있어서 더욱 낭만적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항구 앞 벤치에 앉아 바닷가 전경을 즐겼다. 어둠이 짙어지자 바다 너머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우뚝 솟은 종탑이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저녁 7시였는데도 불구하고 새벽 감성을 자극하는 로맨틱한 풍경이었다. 출렁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어느새 깜깜해진 바다를 보고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 밤바다'가 생각나서 이어폰을 꺼냈다. '여수 밤바다'를 듣는데 유독 '너와 함께 걷고 싶다'는 가사가 와닿았다. 로빈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싶은 매력적인 곳이다.
로빈에서는 이틀 전 아팠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편안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고즈넉한 항구, 특색있는 골목 등 로빈의 그림 같은 풍광이 나를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치유해 주었다. 로빈이라는 도시를 알고 여행을 온 것도, 2박 3일로 여유 있게 로빈을 탐방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찬바람이 슬슬 불어서 몸을 일으켰다.
티토 광장 근처에는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레스토랑과 바가 많았다. 가로등 불빛도 환하게 켜져서 거리가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골목을 들어서자 조명이 거의 없어 음침하고 한산했다. 어두운 골목을 헤쳐 나가니 방탈출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 씻고 로빈에서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