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7일차: 피란과 로빈, 아드리아해를 품은 낭만적인 항구 도시
아침에 푹 자고 일어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컨디션이 70% 정도 회복돼서 남은 일정을 정상적으로 소화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안도감을 느끼며 거울을 봤는데 양쪽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평소보다 긴 수면시간 탓에 쌍꺼풀도 굵게 져 있었다. 내 얼굴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샤워를 하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오전 11시쯤 타르티니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에서 브런치를 먹을 만한 곳을 찾다가 Kavarna Piran을 발견했다. 전날과 다르게 날씨가 따뜻해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직원이 등장했는데 나를 보자마자 한국어로 "안녕"이라고 말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채서 신기했다. 나도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했다. 주문한 오믈렛을 기다리는 동안 직원이 간단한 한국어로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한국어를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오믈렛 맛은 평범했지만 친절하고 재미있는 직원 덕분에 즐겁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배를 채웠으니 소화할 겸 성벽 전망대로 걸어갔다. 피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성벽은 합스부르크 시대에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 200m 남짓만 남아 있다. 광장에서 성벽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심한 오르막길이었다. 숨이 차서 힘들었지만, 근사한 경치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한 발씩 나아갔다. 쉬엄쉬엄 올라가다 보니 성벽 입구가 나왔다.
전망대 계단을 오르는데 아이들이 재잘대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니 근처 놀이터였다. 아이들이 해맑게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저 아이들처럼 근심 걱정 없이 놀던 때가 문득 그리워졌다. 어릴 때는 '살기 힘들다', '인생이 쓰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내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때때로 중압감으로 변해 버겁게 느껴지곤 한다.
성벽 전망대에 올라서자 피란 시내가 한눈에 담겼다. 옹기종기 모인 주황색 지붕들, 짙푸른 바다, 그리고 맑은 하늘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뤘다. 뾰족 튀어나온 삼각형 모양의 피란반도는 아드리아해로 나아가는 뱃머리 같았다. 동유럽 여행 영상을 만들면 썸네일로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절경이었다. 성벽의 좁은 통로를 왔다갔다하며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풍광을 즐겼는데, 시선이 닿는 곳마다 아름다워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렀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성 조지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기자기한 마을 너머로 쪽빛 바다가 넘실거려 눈을 뗄 수 없었다. 오른편에 해안산책로가 있어서 잠깐 걷다가 다시 성당으로 향했다. 성 조지 성당은 피란의 수호성인 성 조지를 기념하기 위해 14세기에 지어졌다. 현재 모습은 17세기에 완성됐다고 한다. 언덕 위 성당에 발을 딛자 바로 눈앞에 타르티니 광장과 피란 항구가 보였다. 성벽에서 본 풍경을 10배 확대해놓은 것 같았다. 이미 성벽 전망대를 다녀와서 성당 종탑에 있는 전망대는 오르지 않았다.
붉은 지붕이 훤히 보이는 낮은 돌담길을 지나 숙소에 도착하니 1시 30분이었다. 2시 20분에 크로아티아 로빈으로 가는 고옵티 셔틀버스를 타야 해서 체크아웃을 하고 타르티니 광장으로 갔다. 광장에 플리마켓이 열려서 그림, 액세서리 등을 구경하다가 고옵티 탑승 장소로 이동했다. 2시가 되자 '고옵티'가 써진 승합차 한 대가 나타났다. 기사님은 내 이름을 확인한 후 "더 탈 사람 없으니 바로 출발할게요"라고 말했다. 고작 몇 분 차이였지만 예정보다 일찍 피란을 떠나니 아쉬웠다. 다음에는 꼭 건강할 때 와서 아담하고 예쁜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고옵티는 다른 도시에서 먼저 탄 외국인 한 명과 나를 싣고 로빈으로 달렸다. 기사님이 액셀을 세게 밟아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맞닿은 국경에 금세 도달했다. 각국 검문소에서 여권 심사를 받은 뒤 무사히 국경을 통과했다. 자동차로 국경을 넘으며 다른 나라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유럽 사람들이 부러웠다.
도로 위 '웰컴 투 크로아티아' 간판을 보니 크로아티아에 온 게 실감이 났다. 2013년 방영된 tvN '꽃보다 누나'를 본 후 크로아티아는 줄곧 나의 로망 여행지였다. 크로아티아의 여러 도시 중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로빈이다. 로빈은 '이스트라반도의 진주'라 불리는 작은 해안도시로, 약 500년간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치를 받아 베네치아의 색채가 짙게 남은 곳이다. 크로아티아를 다녀온 친구들이 입을 모아 추천해서 기대감이 높았다.
피란에서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로빈 버스 터미널 땅을 밟았다. 우선 짐을 풀기 위해 숙소인 Studio Apartment Sunce로 걸어갔다. 돌길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끄니까 팔이 점점 아팠다. 숙소까지 거리가 꽤 멀어서 중간에 쉬었다가 발길을 재촉했다. 숙소 앞에 도착해 진한 갈색 대문 옆 초인종을 눌렀는데, 벨을 누른 지 한참이 되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한 아주머니가 "내가 주인한테 전화해볼게요"라고 말했다.
몇 분 뒤 연락을 받은 주인이 건물에서 나왔다. 어머니 또래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엄청 친절했다. 그녀는 "죄송해요, 초인종 소리를 못 들었네요. 짐은 저한테 주세요"라고 말했다. 이어 내 캐리어를 들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아요! 제가 들게요"라며 만류했지만,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끝까지 내 캐리어를 챙겼다.
건물이 낡아서 방이 지저분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로 방 내부가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넓은 침대와 테라스도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테이블 위 바구니에는 귤, 바나나 등 과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손님을 생각하는 주인의 정성과 애정이 한껏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테라스에서 마을 전경을 보며 한 시간 가량 쉬다가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로빈 여행의 시작점인 티토 광장에 들어서자 시계탑과 작은 분수가 보였다. 빈티지한 색감의 건물들은 요트가 정박한 항구를 둘러싸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멍하니 바라보니 외로움과 쓸쓸함이 밀려왔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지만, 이렇게 멋진 장면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할 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왔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곤 한다.
해안가에는 바다 전망의 레스토랑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로빈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맛 좋은 음식이 많기로 유명하다. 나는 사전에 알아본 맛집 La Puntulina를 찾아갔다. 저녁 6시에 방문했는데 여자 직원이 "죄송해요. 예약이 꽉 차서 자리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식당을 나가려고 하는데 남자 직원이 다가와 "혹시 혼자 오셨어요? 한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있어요"라며 희소식을 전했다. 몇 분 전 바다를 조망할 때는 혼자여서 아쉬웠는데, 지금은 혼자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바 테이블에 앉아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며 해산물 스파게티를 먹었다. 도톰한 새우, 알이 큰 홍합 등 싱싱한 해산물들이 스파게티에 푸짐하게 올라가 있었다. 레스토랑 지붕에 걸쳐 환한 빛을 내뿜던 태양은 점점 빨갛게 타올라 바다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풍광을 만끽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분위기도 환상적이고 맛도 훌륭해서 여운이 오래 남았다.
식당에서 계산을 마치고 절벽에 위치한 수영 스팟에 가서 일몰을 감상했다. 낙조에 물든 하늘이 파란색과 주황색의 그라데이션을 이뤄 비경을 연출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경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카메라에 수십 장의 일몰 사진을 남긴 뒤 티토 광장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밤이 깊어 거리의 조명들이 항구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불빛이 드리워진 파스텔톤 건물들은 새까만 바다와 어우러져 감성을 자극했다.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은 달빛 아래 일렁이는 밤바다 위를 미끄러지며 운치를 더했다. 로맨틱한 야경을 보며 낭만을 즐기다가 저녁 8시쯤 숙소로 복귀했다.
씻고 테라스로 나오자 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별들이 보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관찰하며 상쾌한 밤공기를 마시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로빈의 황홀한 야경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서 침대에 누워 머릿속으로 계속 풍경을 그렸다.